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라는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표현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위키피디아는 원 히트 원더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원 히트 원더는 대중 음악에서, 한 개의 싱글(혹은 곡)만 큰 흥행을 거둔 아티스트를 의미하는 말이다. 원 히트 원더 가수들은 당대의 유행에 편승하여 잠깐 동안 인기를 끌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흥행 이후 계속해서 그 인기를 끌어가려고 분투했던 가수들도 많이 있다.


네, 누구나 일단 한 번 '터지고 나면' 자기 앞엔 꽃길만 기다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사실 우리 인생에서 절정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공갈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마이너리그 역대 최다 홈런 기록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스포츠 블로그에서 웬 대중음악 이야기냐고요? 스포츠에도 이런 원 히트 원더가 적지 않기 때문이죠. 각종 데이터 및 개념 시각화에 열심인 인터넷 사이트 '더 푸딩(pudding.cool)'에서 최근 30년간 어떤 선수가 종목별 최고 원 히트 원더였는지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 눈에 제일 띈 건 돈트렐 윌리스(36·현 FOX스포츠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아래 사진)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를 지켜 보신 분이라면 '하이킥' 투구 동작으로 유명했던 이 왼손 투수를 기억하실 겁니다. 물론 윌리스가 투구 동작만으로 유명했던 건 아닙니다.


윌리스는 플로리다에서 데뷔한 2003년 14승 6패, 평균자책점 3.30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상을 차지했습니다. 플로리다는 이해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4승 2패로 꺾고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윌리스로서는 데뷔 첫 해 이미 챔피언 반지를 차지한 것. 


이로부터 2년 뒤에는 22승(10패)을 거두면서 크리스 카펜터(43·당시 세인트루이스)에 이어 사이영상 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윌리스는 겨우 23살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전도유망한 젊은 투수'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었죠. 윌리스는 데뷔 첫 3년 동안 46승(27패)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2011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오르기까지 8년 동안 26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 사이 패전 경기는 42번이 쌓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내려갔을 때 그는 겨우 스물 아홉이었지만 다시 '더 쇼'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원 히트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저는 김경원(37·사진)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현재 경찰청 코치인 김경원은 이제 인터넷에서 현역 시절 사진도 찾기 어려운 인물이 됐지만 중앙대를 중퇴하고 OB(현 두산) 유니폼을 처음 입었던 1993년에는 정말 센세이션 그 자체였습니다. 


김경원은 이해 9승 3패 23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11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단일 시즌 평균자책점 톱5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딱 두 명 선동열(55·현 국가대표 감독)과 김경원뿐입니다. 1993년 기록한 1.11이 역대 4위에 해당하는 평균자책점입니다.


이런 선수 커리어에 팀 우승이 빠지면 서운한 일. OB는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4승 3패로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데뷔 3년째이던 이해 한국시리즈 때 김경원은 이미 자기 공을 던지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김경원은 두산에서 전력분석원으로 일하던 2013년 스포츠동아 인터뷰에서 "우승을 했는데 얼굴이 어두운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경원은 1997년 3승 2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96으로 '퐁당퐁당' 선수는 되는가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두산이 다시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2001년 그는 한화에서 22과 3분의 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6.45를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당시 그는 겨우 서른 살이었습니다.


김경원보다 1년 먼저 프로 데뷔한 염종석 전 SPOTV 해설위원(45)은 아예 데뷔 첫 해에 모든 걸 끝냈습니다(?). 염종석은 1992년 17승 9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했고 롯데도 이해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염종석은 이듬해(1994년)에도 10승(10패 7세이브)을 거뒀지만 이후 2008년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염종석은 93승 133패(승률 .412)로 은퇴했으니까 그가 마운드에 오르면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은 투수로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1992년 염종석이라면 아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네, 그건 데뷔 첫 해 204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며 혹사 당한 영향이 큽니다. 염종석은 1992년 완봉승 두 번을 포함해 13번 경기를 혼자 책임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제가 필요하다면 저는 또 마운드에 오를 것입니다. 1992년에 그렇게 던졌던 것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를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던질 수는 없겠지만,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에이스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게 진짜 무식한 일인 줄 알면서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혹사는 분명 '팬의 꿈을 빼앗는 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염종석이 말한 것처럼 때로는 투수에게 자기 야구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한때를 선물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네, 그렇게 저는 원 히트 원더를 좋아합니다. 적어도 그들은 한때는 모든 걸 불살랐으니까요.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뜨겁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그라운드에 남겼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해도) 진짜 현실 야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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