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시속 150 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를 마다할 야구 감독은 없다. 야구 팬 역시 마찬가지다. 팬들은 강속구(强速球)라는 말도 모자라 광속구(光速球)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며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를 찬양한다.
시속 150km 정도 속구라면 홈플레이트까지 도달하는데 약 0.44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 구속으로 날아오는 투구에 완전한 대응력을 갖출 수 있는 타자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제구만 된다면, 강속구야 말로 투수에게 있어 가장 큰 무기가 아닐 수 없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
하지만 빅리그 통산 300승에 빛나는 그렉 매덕스의 최고 구속은 시속 130km 후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 상대적으로 낮은 포심(four seam) 구사율 때문에 이 정도 빠르기를 보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 한때 그가 시속 160 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던 투수였다는 건 이제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제이미 모이어는 한 술 더 뜬다. 모이어의 경우 투구 패턴 자체가 '느리게, 좀 더 느리게, 그보다 더 느리게'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모이어는 오늘 현재까지 통산 217승을 챙겼고,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역시 강속구 투수가 아니면서 300승을 코 앞에 둔 탐 글래빈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타자가 느끼는 구속 역시 마찬가지다.
"배팅은 타이밍, 피칭은 그 타이밍을 빼앗는 것."
스피드건을 통해 전광판에 표시되는 구속은 이른바 물리적 속도다. 말 그대로 투수의 손끝을 떠난 공이 어느 정도 속도로 홈 플레이트를 향해 출발했는지를 가리키는 수치. 하지만 투수는 스피드건이 아니라 살아서 반응하는 타자를 상대한다.
그래서 타자는 한 가운데 치기 좋게 들어온 커브에 서서 당하기도 하고, 절묘하게 코너워크를 이룬 시속 160km짜리 속구를 받아쳐 장외 홈런을 날리기도 한다. 투구 질(質) 자체도 문제지만, 타자 반응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투구 동작이 끝난 뒤 타자에게 주어진 반응 준비 시간은 약 0.2초. 타자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눈으로는 구질을 파악하고, 공의 경로를 예측하며 이에 따른 '타격 포인트'를 계산해 내야 한다. 동시에 이렇게 계산된 타격 포인트에 재빨리 방망이 중심을 가져가는 신체적 반응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타자가 반응하는 대상은 투구 자체가 아닌 그로부터 파생된 '가상의 타격 포인트'다.
통산 2,000 안타를 눈앞에 둔 양준혁 역시 최근 한 인터뷰에서 타격 포인트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상대 투수에 따라 허공에 서로 다른 타격 포인트를 그려 놓고 거기로 지나가는 공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자기 타격 비법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빠른 공이 위력을 갖는다. 타자의 타격 포인트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빠른 공만 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다. 필 니크로의 318승은 겨우 시속 90km밖에 나가지 않는 너클볼 덕분이었고, 투심 역시 일반적으로 포심에 비해 시속 5km 가량 느리지만 타격 포인트를 뒤흔드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 방면의 대가는 단연 워렌 스판. 메이저리그 좌완 최다승(363승)에 빛나는 스판의 주특기는 같은 구종을 각기 다른 속도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상대 타자의 타격 포인트 계산이 더더욱 복잡해졌음은 물론이다. 어느 타자는 스판과 상대하면 자신의 머릿속이 난도질당한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스판이 밝힌 성공의 비법은 너무도 단순명료했다. "배팅은 타이밍, 피칭은 그 타이밍을 빼앗는 것." 그리고 이 명언의 효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승리하면 조금은 배운다. 하지만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지난 10일 1대 1로 현대와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KIA 서정환 감독은 마무리 투수 한기주를 마운드에 올렸다. 몇 차례 연습 투구가 끝나고 타석에는 전준호가 들어섰다. 초구는 볼. 하지만 팬들은 한기주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전광판에 나타난 "152 km/h" 때문이었다.
그러나 팬들 환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준호가 때린 타구는 한기주 곁을 스쳐 안타로 연결됐다. 연장전 승부의 긴장감 때문인지 KIA 팬들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조용히 전광판에는 안타를 맞은 투구의 속도가 찍혔다. "153 km/h".
전준호에게 안타를 맞은 이후에도 한기주는 계속해서 위협적인 구속을 자랑했다. 그러나 서한규가 때린 땅볼은 1루 주자 전준호의 도움 속에 내야를 갈랐고, 이택근의 타구는 유격수 홍세완의 키를 살짝 넘기며 전준호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여기서 이숭용에게 결정타로 2루타를 얻어맞으며 한기주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닝을 끝낸 송지만의 타구 역시 상당히 잘 맞은 투수 라인드라이브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서정환 감독은 한기주에 대해 "팔을 타자 가까이 끌고 나와서 채줘야 공 끝이 좋은데 팔꿈치 통증을 의식하는지 공을 그냥 획 던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시속) 150㎞가 넘어도 체감 구속이 그리 좋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야구팬들은 흔히 종속이라는 낱말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종속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릴리스 포인트다. 릴리스 포인트가 앞으로 나올수록 타자의 타격 포인트에 도달하는 시간이 빨라진다. 속구는 물론 커브 같은 변화구도 마찬가지다. 서정환 감독이 말한 체감 구속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일반적으로 릴리스 포인트가 타자 쪽으로 1cm 당겨질 때마다 타자가 체감하는 구속은 시속 0.16 km 빨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구속이라 해도 홈플레이트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속도는 같지만 공의 비행 거리가 줄어드니 당연한 결과다. (∵ 시간=속도/거리)
결국 속도가 똑같은 속구라고 해도 릴리스 포인트에 따라 타격 포인트 왜곡 정도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이 타격 포인트를 왜곡시키는 정도가 클수록 더 질이 좋은 투구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초속-종속의 차이보다 릴리스 포인트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틀 뒤 한기주는 다시 한번 전준호부터 시작하는 현대 타순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삼진 2개에 1루 땅볼 하나로 깔끔하게 마무리. 패배를 통해 자기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수정한 결과였다. 크리스티 매튜슨이 이야기한 것처럼 승리하면 조금밖에 못 배우지만 패배하면 모든 걸 배우는 법이다.
"종속(終速)에의 종속(從屬)"
야구팬들은 공은 빠른데도 소나기 안타를 허용하는 투수에게 "종속"이라는 굴레를 씌우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종속(終速)에 종속(從屬)된 바로 우리 자신이다. 투수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스피드건이 아닌 살아서 반응하는 타자라는 사실을 잊은 바로 우리 자신 말이다.
위에서 예를 든 한기주는 릴리스 포인트가 문제였다. 릴리스 포인트를 끌고 나오지 못하다 보니 타격 포인트를 왜곡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타자가 느끼는 체감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패전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야 할 투수가 오히려 타이밍을 빼앗긴 셈이다.
릴리스 포인트뿐 아니라 볼 배합 역시 타격 포인트를 왜곡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바깥쪽 체인지업을 연거푸 지켜본 타자에게 던진 몸 쪽 속구와 연속으로 들어온 몸 쪽 속구 세 개가 과연 똑같은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타자 역시 스피드건이 아닌 이 체감(또는 효과) 속도로부터 자신의 타이밍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야구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야구는 진정한 멘탈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종속이라는 굴레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이제 이 굴레를 벗어나 투수와 타자의 멘탈 속으로 빠져들 때다. 투수와 타자의 타이밍 싸움, 종속을 측정할 수 있는 스피드건도 이 마음의 전쟁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스피드건이 아닌 살아 있는 투수와 타자를 응원하자는 얘기다. 야구를 향한 야구팬의 열정도 스피드건에는 찍히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