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아메리칸하키리그(AHL) 토론토 말리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데이비드 에어스 씨. 스포츠넷 홈페이지


북미프로아이스하키리그(NHL) 진출을 목표로 골문을 지키던 데이비드 에어스(43) 씨는 2004년 콩팥 이식 수술을 받으면서 꿈을 접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인근에서 나고 자란 에어스 씨는 "수술을 받고 나서는 그저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 했다. 아이스하키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던 에어스 씨가 22일(이하 현지시간) 토론토 스코샤뱅크 아레나(옛 에어 캐나다 센터)에서 상대팀 캐놀라이나 유니폼을 입고 NHL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22일 경기에서 링크로 들어오고 있는 에어스 씨(앞). NHL 제공


이 경기에서 캐롤라이나가 토론토를 6-3으로 꺾으면서 에어스 씨는 NHL 데뷔전에서 최고령(만 42세 6개월 10일)으로 승리를 기록한 골리(골키퍼)가 됐습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승패를 기록하는 것처럼 아이스하키에서도 골리가 승패를 기록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던 걸까요? 힌트는 그가 '골리'였다는 데 있습니다.



EBUG 또는 응급 골리

북미프로아이스하키리그(NHL)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에어스 씨. NHL 제공 


NHL에는 아주 독특한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NHL 공식 규칙에 따르면 현역 엔트리 숫자는 20명이고 이 가운데 두 자리를 골리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상 등으로 골리가 두 명이 모두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누가 골대를 지킬까요?


축구에서는 이럴 때 필드 플레이어가 골키퍼를 맡게 되지만 NHL에서는 '응급 백업 골리(EBUG·Emergengy Back Up Goalie)'를 투입합니다.


2018년 3월 29일 EBUG로 시카고 골문을 지킨 스캇 포스터 씨. 시카고=AP 뉴시스


EBUG는 정식 NHL 선수가 아닙니다. 보통 사회인 리그에서 활동 중이거나 학창시절 골리로 뛰었던 '선출'이 이 비상 골리를 맡습니다.


안방 팀은 경기 시작 전 EBUG 한 명을 지정해 경기장에 대기시켜야 합니다.


경기당 비상 골리는 한 명입니다. 섭외는 안방 팀에서 담당하지만 방문 팀 쪽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방문 팀 유니폼을 입고 링크에 나서기도 합니다.


EBUG가 경기에 출전하면 수당으로 500 달러(약 61만 원)를 받습니다. 또 그날 입은 (어센틱) 저지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네, 에어스 씨도 이날 EBUG로 스코샤뱅크 아레나 링크를 밟았습니다.



잼보니 운전사

토로토 말리스 안방 경기에서 잼보니를 몰고 있는 에어스 씨. Toronto Foundation for Student Success 홈페이지


에어스 씨 원래 직업은 코카콜라 콜리세움 운영팀 매니저입니다.


이 경기장은 아메리칸하키리그(AHL) 소속 토론토 말리스(Marlies)가 안방으로 쓰는 곳입니다.


AHL은 NHL 하부리그입니다. 그러니까 '메이저리그 : 마이너리그 = NHL : AHL'입니다.


코카콜라 콜리세움에서 맨 처음 그는 잼보니 운전사로 일했습니다. 한자로 '정빙기(整氷機)'라고 쓰기도 하는 잼보니는 빙판을 평평하게 만드는 구실을 합니다.


운영팀 매니저로 승진(?)한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는 잼보니를 운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NHL 데뷔전에서 상대했던 토론토 구단 훈련 파트너로도 일합니다.


아울러 에어스 씨는 캐롤라이나 산하 AHL 팀 샬럿 체커즈에서도 EBUG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어스 씨가 토론토 구단하고만 인연이 있던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토론토 구단 직원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응급 상황 발생, 응급 상황 발생!

이 경기 캘롤라이나 선발 골리였던 제임스 라이머. NHL 제공


캐롤라이나는 이날 주전 골리 제임스 라이머(32)를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라이머는 1피리어드 시작 6분 10초 만에 부상으로 링크에서 나왔습니다.


토론토 구단 관계자가 관중석에 있던 에어스 씨에게 전화를 걸어 EBUG 대기실로 내려오라고 전했습니다. 1단계 발동이었습니다.


에어스 씨는 골리 복장을 갖춘 뒤 계속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이전 세 시즌 동안은 토론토 안방 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번 시즌에는 절반 정도 예비 EBUG로 대기했던 에어스 씨는 "전에도 이런 일은 너댓 번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보통은 1단계에서 끝났지만 이날은 달랐습니다. 라이머 뒤를 이어 캐롤라이나 골문을 지키던 백업 골리 페트르 므라제크(28)마저 2피리어드 종료를 8분 41초 남겨두고 링크 위에 쓰러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에어스 씨는 2018년 3월 29일 시카고 골문을 지킨 스캇 포스터(38) 씨 이후 처음으로 NHL 링크를 밟은 EBUG가 됐습니다.



에어스 씨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와도 나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론토) 선수단과 연습을 함께 했기 때문에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러나 달랐다. 그 전에는 많아야 수백 명 앞에서 경기를 뛰어본 게 전부였다. 2만 명 가까운 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링크에 나서려니 처음에는 떨렸던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날 스코샤뱅크 아레나를 찾은 팬 1만9414명은 박수와 환호로 에어스 씨를 맞이했습니다.



Miracle On Ice

캐롤라니아 골문 앞을 막아서고 있는 에어스 씨. 유튜브 캡처 


에어스 씨가 링크에 들어갔을 때는 캐롤라이나가 3-1로 앞선 상태였습니다. 곧이어 캐롤라나이에서 추가골을 넣으면서 4-1.


토론토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토론토는 에어스 씨를 상대로 두 골을 뽑으면서 4-3까지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자 에어스 씨는 '철벽' 모드를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점을 내준 뒤로 토론토 슈팅 8개를 내리 막아낸 것. 결국 캐롤라이나가 6-3으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에어스 씨는 28분 41초 동안 NHL 데뷔전을 소화한 뒤 "첫 골을 내준 건 실수였다. 긴장감 때문에 너무 빨리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벗어났다. 두 번째는 상대가 잘 넣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 "처음에 상대 슈팅을 막아내고 또 막아내면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데이브, 데이브, 데이브…

경기 후 팬들 환호에 답하고 있는 에어스 씨. NHL 제공 


이날 에어스 씨와 함께 경기장에 있던 아내 사라 씨는 캐롤라이나 선수단이 라커룸에 들어서는 남편에게 삼페인 세례를 퍼붓는 장면을 공유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여자다. 내 남편이 마침내 엄청난 꿈을 이뤘다"고 썼습니다.


"아직 목소리가 남아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쓴 건 하도 소리를 질러 목이 다 쉬었다는 뜻입니다.


영화 '19번째 남자'에도 등장하는 마이너리그 팀 더럼 불스도 '혹시 에어스 씨가 포수는 볼 줄 모르냐?'고 농담을 건넸습니다.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 1루수는 앤서니 리초(30) 2018년 7월 23일 경기서 마운드에 올라 공 2개를 던져 이닝을 마무리하고 내려왔습니다.


리초는 이 경기 후 웃으면서 "통산평균자책점 0.00을 지킬 수 있도록 다시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에어스 씨도 다시 경기에 나서지 않으면 통산 승률 100%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 경기 때도 내가 EBUG 후보로 대기한다. 기회가 오면 또 경기에 나설 것"이라며 "그때는 절대 떨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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