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지난달에 우리는 타격 기록 가운데 타점에 대해 알아봤다. 요약하자면, 타점이 타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척도로 사용되는 게 사실이지만, 타점은 기술보다는 기회의 산물이라는 얘기였다. 다시 말해, 타점이란 혼자서만 잘 한다고 해서 갑자기 성적이 좋아지는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투수의 기록 가운데서도 이런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승패다. 우리 리그에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투수의 힘으로는 단 1득점도 올릴 수가 없다. 투수가 9이닝을 무실점을 막아 냈다고 하더라도 타선이 점수를 뽑아주지 않고서는 승리를 챙길 수 없는 게 야구다. 그런데도 우리는 곧잘 10승 투수, 20승 투수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마치 투수가 잘 해서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된 건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 타선 지원이라는 개념도 고안됐다. 이는 투수의 방어율과 마찬가지로 특정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있을 때 타선이 뽑아준 점수를 9이닝당 비율로 환산한 수치다. 하지만 이 역시 완벽하지 않다. 우선 득점 지원이 고르게 이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득점 분포가 문제라는 얘기다. 18-0으로 한번 이기고 2-4로 패한 경기와, 10-0, 10-9로 이긴 두 경기의 평균 득점 지원은 똑같이 10점이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한걸음 더 내딛어 보자.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똑같이 7경기씩 던진 두 가상 투수의 최종 경기 득/실점 결과물이다.

  • 김승리 ; 1-0(승), 2-1(승), 3-2(승), 4-3(승), 5-4(승), 6-5(승), 0-6(패)
  • 이패배 ; 0-1(패), 1-2(패), 2-3(패), 3-4(패), 4-5(패), 5-6(패), 6-0(승)
두 투수 모두 모든 경기에서 완투를 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경우 두 투수의 총실점은 21점, 타선의 지원도 21점으로 같다. 득/실점 분포 역시 똑같다. 하지만 김승리 선수는 6승 1패나 거둔데 비해 이패배 선수는 1승 6패에 그치고 만다.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투수의 승패 기록이 일반적인 통념만큼 투수의 능력치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이 9이닝 4실점의 결과가 때로는 승리가 되는 반면 때로 패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승패는 타선의 영향을 너무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잘 던지는 투수일수록 승리를 챙겨갈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투수의 승패는 운이다. 따라서 어느 투수가 어느 경기에서 얼마나 잘 던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지표가 필요하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빌 제임스(Bill James)는 투수의 개별 경기 성적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하나 고안해 냈다. 이것이 바로 게임 스코어(Game Score)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산출된다.

50점에서 시작

  •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을 때마다 1점씩 더한다. (1이닝 = 3점)
  • 4회 이후 이닝을 '끝마칠' 때마다 2점씩 더한다. (6 2/3, 6이닝 모두 4점.)
  • 삼진을 잡을 때마다 1점씩 더한다.
  • 안타를 맞을 때마다 2점씩 뺀다.
  • 볼넷을 내줄 때마다 1점씩 뺀다.
  • 자책점이 기록되면 4점씩 뺀다.
  • 비자책인 경우는 2점씩 뺀다.
한마디로 투수가 잘하면 더하고, 못하면 빼는 방식으로 점수를 부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경기 내용이 좋았다면 높은 게임 스코어를 받게 마련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낮은 점수밖에는 얻지 못하도록 짜여진 괜찮은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05년 8월 14일, 롯데와 삼성의 대구 경기, 양 팀 에이스간의 맞대결이 펼쳐진 날이었다. 결과는 1:0 삼성의 승리, 정말 오래도록 기억될 명투수전이었다. 승리투수는 삼성 선발 배영수 선수. 그러나 많은 야구팬들은 손민한 선수의 호투를 칭찬했다. 아쉬운 패배라는 것이다. 게임 스코어가 이를 증명한다. 손민한 68, 배영수 67로 손민한이 승리한 것이다. 겨우 한점밖에 나지 않는 차이가 이 승부가 진정 박빙이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래도 더 잘 던진 쪽은 손민한 선수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한번 '05 시즌 가장 높은 게임 스코어 상위 5위안에 든 경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공교롭게도, 게임 스코어 87점으로 공동 1위를 차지한 배영수의 4월 8일 현대와의 홈경기 기록은 패배다. 9이닝 동안 삼진을 14개나 솎아 내며 호투를 펼쳤지만 별 수 없었다. 단 3안타밖에 얻어맞지 않았지만 하필 그 가운데 한 방이 홈런이었다. 그걸로 2실점. 나머지 안타 2개는 모두 단타였다. 이 정도 호투를 펼치고도 기록지 위 그의 이름 옆에는 (敗)라는 한 글자가 적힐 수밖에 없었다. 배영수에게는 작년 한국 시리즈 비공식 노히느 노런의 악몽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가장 낮은 게임 스코어 5 경기도 살펴보자.



다행히(?) 모두 패배다.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기록이 바르가스의 5 1/3이닝이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마저 10실점의 대기록(?)이었다. 나머지 선수들 모두 기본적으로 8실점은 깔고 들어갔다. 그러니 마운드에서 조기에 강판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광삼 선수의 경우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아내는 동안 무려 8실점, 팬들을 아연실색하게 할 수밖에 없던 내용이었다. 투수는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질 수는 있다. 확실히 그렇다. 위에 언급된 정도의 경기 내용이라면, 패배는 사실 투수의 책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패배가 투수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위에 소개된 배영수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반대로 비교적 나쁜 투구 내용에도 승리를 챙기는 경우도 우리는 곧잘 볼 수 있다. 게임 스코어를 통해서 이 역시 확인이 가능하다. 게임 스코어가 50점이 안 됨에도 승리를 챙긴 경우를 흔히 값싼 승리(Cheap Win), 그 반대의 경우를 아쉬운 패패(Tough Lose)로 표현한다. 가장 높은 게임 스코어에도 패전으로 기록된 경기는 위의 배영수이며, 거꾸로 가장 낮은 게임 스코어로 승리를 챙긴 경우는 5월 29일 수원 홈경기에서 기아를 상대했던 현대의 김수경이었다. 그날 그의 게임 스코어는 18점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아쉬웠던 패배의 순간들은 ;



몇 차례 계속 언급해 미안한 생각마저 들지만, 사실 이번 시즌 가장 승운이 없던 선수는 배영수였다. 그는 가장 높은 게임스코어에도 패전 투수로 기록됐을 뿐만 아니라, 아쉬운 패배를 다섯 차례나 기록하며 이 부분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이 다섯 경기에서 그의 평균 게임 스코어는 59.2로 수준급이다. 평균 7이닝을 웃돌게 던지면서 방어율 3.06의 뛰어난 방어율을 기록했지만 별 수 없던 일이었다. 다섯 경기 모두 퀄리티 스타트였다.

반대로 값싸게 승리를 챙긴 순간들은 ;



김해님, 랜들, 바르가스, 손민한, 정민철, 최원호 등이 모두 세 차례씩의 값싼 승리를 거두며 운 좋게 3승씩을 추가했다. 한화 선수 두 명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역시나 팀 타선의 공격력의 덕을 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운이 좋은 선수라면 역시 정민철이다. 나머지 다섯 투수와 달리 아쉬운 패배가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 승수의 33.3%가 값싼 승리였다.

물론, 투수들은 일반적으로 이긴 경기에서 더 잘 던졌고, 그렇지 못한 경기에서 더 못 던졌다. 총 1008번의 선발 등판 가운데서, 선발 투수가 승리를 챙겨간 329 경기의 경우 평균 6.49이닝을 던졌고, 방어율은 1.84밖에 되지 않았다. 패한 355 경기에서는 승리 투수 요건에도 못 미치는 평균 4.54이닝에 방어율은 무려 7.65나 됐다. 승패 기록이 없는 나머지 324 경기에서는 평균 4.65이닝에 방어율 4.37로 둘의 중간 수준이었다.

게임 스코어로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다. 이긴 경기 평균 게임 스코어는 61.5, 패한 경기는 38.0, 나머지 경기에서는 48.1이었다. 확실히 잘 던지면 잘 던질수록 승리를 챙겨갈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그리고 타선이 적은 점수밖에 뽑아주지 못할 때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는 투수라야 에이스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수가 좀 적다고 해서 투수의 실력이 폄하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얘기다. 패수가 많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록만으로 선수를 판단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기록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때로 많은 패배나 적은 승수는 단순히 운이 나쁜 결과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게임 스코어 역시 100% 정확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게임 스코어 계산에는 피안타 개수가 들어간다. 최근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인플레이(Balls in Play)된 타구가 안타로 연결되는 건 투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투수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에 반영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비진의 질(質) 또한 게임 스코어에 반영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기의 승패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이다. 아쉬운 패배 다섯 번이 없었다면, 적어도 그 경기에서 패전의 주인공이 되지만 않았다면, 배영수도 11패 투수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한번, 15경기 이상 선발 등판한 투수를 대상으로 시즌 평균 게임스코어를 구해봤다. 아래는 그 결과물이다.

손민한, 배영수, 박명환 등 지난 시즌 전반기 빅3를 구축했던 투수들의 이름이 상위 세 자리를 차지했다. 손민한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난 시즌 최고 선발 투수이며, 배영수 역시 승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 리그 최상위권의 투구를 선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명환 역시 마찬가지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좋은 모습을 선보이리라는 기대를 가져도 좋을 만한 좋은 기록이다. 이상목의 후반기 투구 내용 역시 이번 시즌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리오스의 경우, 기아 시절의 부진만 아니었다면 아마 좀더 높은 순위에 랭크됐을지도 모르겠다. 두산 이적 이후 그의 평균 게임스코어는 무려 67.0에 달한다.

거꾸로 가장 낮은 평균 게임 스코어를 기록한 선수들이 명단 역시 알아보자.

'04 시즌 신인왕이었던 오재영 선수의 이름이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런 투구 내용이었다면 11패의 변명거리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김수경 선수 역시 FA가 되는 시즌만 아니었다면 연봉 인상 요인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위 다섯 번째에 기록된 손승락 역시 신인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이상 세 명이 현대 소속의 선수들이다. 디펜딩 챔피언이던 현대가 7위로 주저앉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발 투수진의 부진이었다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스미스는 시즌을 마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고, 김광삼 역시 '04 시즌에 보여줬던 가능성이 다소 수그러진 시즌이었다.

'04년 5월 18일, 당시 MLB 애리조나 소속이었던 랜디 존슨은 애틀란타 원정 경기에서 퍼펙트 경기를 기록했다. 당연히 볼넷과 피안타는 단 하나도 없었고, 실점도 마찬가지였다. 탈삼진은 13개. 게임 스코어는 딱 100점이었다. 물론 게임 스코어로 100점이 만점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대단한 기록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 꽉 채운 듯한 느낌이 드는 수치다. 이런 느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게임 스코어다.

이제 '06 시즌 프로야구가 개막된다. 그리고 또 1008번의 선발 등판이 있을 것이다. 야구의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이번 시즌엔 어떤 선수가 몇 점으로 최고 점수를 받게 될까? 한번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야구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성적표를 받아야 하는 투수한테는 조금 괴로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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