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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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오늘 삼성 라이온즈는 팀 창단 2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01년에도 삼성 라이온즈는 우리 프로야구에서 통산 승률이 가장 좋은 팀이었다. 1982년 원년 멤버로 시작한 삼성은 2001년까지 20년 동안 1283승 51무 1024패(승률 .544)를 기록하고 있었다. 2위 해태·KIA보다 19승을 더 거둔 성적이었다.

그러나 해태가 9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하는 동안 삼성은 7번이나 고배를 마셔야 했다. 1985년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 시즌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한국시리즈'에 대한 갈망은 그 후로도 16년이나 풀리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7전 8기를 되짚어 보자.


비행접시처럼 날아간 홈런

1982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는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비행접시」처럼 날아간 金裕東(김유동) 만루홈런", "환상적 아치에 三星(삼성) 넋 잃고…OB 감격의 만세"

사실 1982년 한국시리즈는 5차전에서 삼성이 패하면서 3승 1무 1패로 이미 OB 쪽으로 무게추가 많이 기운 상태였다. 게다가 김유동이 만루홈런을 터뜨린 9회초에도 OB가 이미 4-3으로 앞서 있었다.

하지만 공은 둥글고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때 터진 완벽한 확인사살.


이날 동아일보 사진설명처럼 "똑같이 미칠 것 같은 勝者(승자)와 敗者(패자)"를 만든 그 홈런 한 방으로 삼성은 첫 번째 무릎을 꿇어야 했다.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이선희는 우리나라 첫 프로야구 경기에서도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던 장본인. 그렇게 첫 번째 프로야구 시즌은 만루홈런으로 시작해 만루홈런으로 끝났다. 패자는 두 번 모두 삼성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믿었다. 처음이었으니까.


최동원, 최동원, 최동원, 최동원

이 당시 프로야구는 전후기 리그로 나누어 진행했다. 총 100경기를 전기 리그 50경기, 후기 리그 50경기로 나누는 방식이었다. 전후기 우승팀이 맞붙는 경기가 바로 한국시리즈. 삼성은 전기 리그를 1위(32승 18패)로 마감했다.

일찌감치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삼성은 후반기도 1위를 차지해 한국시리즈 없이 '완전 우승'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후반기는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후반기 1위는 29승 1무 20패를 기록한 롯데 차지였다. 삼성은 23승 27패로 6개 팀 중 5위에 그쳤다.

그런데 프로야구 정규리그가 끝난 이튿날(1984년 9월 24일) 동아일보는 제목에 "사자 「야욕의」 발톱 팬들 가슴을 찢다"고 썼다. '자이언츠 씁쓸한 後期(후기) 우승', '추악한 造作(조작)' 같은 표현도 눈에 띄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인 코치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에 나선 롯데는 OB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였다. 삼성은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OB가 영 껄끄러웠다. OB는 전반기에도 30승 20패로 2위를 차지한 강팀이었고 롯데는 전반기 4위팀이었다. 결국 삼성은 9월 22, 23일 맞대결에서 롯데에 일부러 연거푸 패하며 롯데에 우승을 안겼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 고르기에 성공했던 것.

누가 알았으랴. 후반기에만 18승을 달성한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더 보탤 줄. 삼성은 "어린이에 「사기」 가르쳐 준 꼴"이라는 비판을 듣고도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우승을 차지한 롯데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충치를 줬다.



영호남 시리즈 완패…1990년 LG엔 0-4

1986 한국시리즈는 첫 번째 영호남 대결이었다. 해태 홈구장인 무등야구장에서 광주 팬들이 '김대중 선생님'을 목 놓아 부르던 그 시절. 그러나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팬들은 김대중보다 '김정수'를 더 많이 찾았다.

이해 신인이던 김정수는 한국시리즈에서 4경기에 등판해 3승을 거뒀다. "가을 까치"의 탄생이었다. 경기 내용에 실망한 대구 팬들은 원정팀 해태 버스를 불살랐지만 시리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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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다고 믿었다. 바로 전해 전후기 리그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 자체를 없애버린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 팬들은 우리에게도 곧 영광의 순간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듬해에도 삼성은 해태의 벽을 넘지 못했다. 4전 전패, 완벽한 패배였다. 해태 김정수는 2승을 챙겼고, 삼성 에이스 김시진은 2패를 안았다. 김시진은 삼성 유니폼을 완전히 벗을 때까지 한국시리즈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삼성은 김시진을 최동원과 트레이드하며 심기일전했지만 1990년에도 LG에 4전 전패를 당하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3년 뒤 다시 맞이한 한국시리즈. 1993 한국시리즈 파트너 역시 해태였다. 삼성은 신인왕을 거머쥔 양준혁, 홈런왕 김성래, 언더핸드 에이스 박충식으로 무장했지만 이번에도 해태를 넘지 못했다.

빛바랜 박충식의 15이닝 완투만이 삼성 팬들이 이 시리즈를 기억하는 이유다.



마지막 악령

그리고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8년이었다. 세월은 흘러 징그럽게 삼성을 괴롭히던 해태 출신 김응용 감독이 삼성 수장이었다. 한국시리즈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 우승을 차지하던 명장 김응용.

상대도 쉬워보였다. 정규 시즌을 3위로 마감한 두산은 준플레이오프에 이어 플레이오프까지 치르며 체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큰 경기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인 삼성의 '새가슴'에도 주목했다." "삼성은 20년 동안 한국시리즈에 6차례나 올랐으나 번번이 우승 문특에서 주저 앉았다."(동아일보 2001년 10월 19일)

결국 개막전 예상 총평은 이랬다. "삼성 센 건 확실한데 두산 기세 만만찮아." 정말 만만치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제는 코치가 된 이선희가 "사람들이 아직도 종종 그 얘기를 한다니까요"하고 말한 게 현실이 됐다.

1차전은 삼성이 가져갔다. 두산이 4-3으로 앞선 5회말. 이승엽이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4-4 동점을 만들었다. 승부가 갈린 건 8회말 2사 3루. 김태균이 결승타를 때린 데 이어 김종훈이 2타점 2루타를 터뜨리며 7-4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2차전이 열릴 예정이던 21일엔 비가 내렸다. 그 비가 문제였을까. 하루 쉬고 열린 2차전에선 김동주가 5타수 3안타 3타점을 기록했고 장원진은 8회말 3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3차전 승자도 두산이었다. 4차전도 마찬가지였다. 4차전에서 삼성은 3회에 8득점 하고도 4회 수비 때 12점을 내주며 무너졌다. "신들린 두산 넋나간 삼성(동아일보 2001년 10월 26일)"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삼성은 5차전을 14-4로 대파하며 1984년부터 계속된 한국시리즈 잠실구장 연패를 끊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6차전에서 두산은 1-2로 뒤진 5회말 우즈가 2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역전에 성공했다. 7회초 3점을 내줬지만 7회말 곧바로 2점을 따라가며 동점을 만들었고 8회말 심재학의 좌익수 플라이 때 정수근이 홈을 밟아 결승점을 뽑았다.


경기가 끝난 뒤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전후기 통합우승을 한 85년을 제외하면 한국시리즈에 7번이나 진출했지만 단 한번도 샴페인을 터뜨리지 못한 삼성의 징크스는 가히 '악령'으로 불릴 만하다. (중략) 그러나 과연 이 모든 결과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을까." 삼성은 이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서야 비로소 사람의 힘으로 이 악령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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