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내가 포기하면 모든 선수가 원치 않는 해외 이적을 거부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 이라부 히데키(伊良部秀輝·1969~2011·사진)

일본프로야구기구(NPB)와 미국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포스팅 제도 손질 마무리 절차에 돌입했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포스팅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지 못한 선수도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제도입니다. 선수는 원하는 구단에 진출하는 대신 구단은 해외 구단에서 이적료를 받는 방식이죠.

올해 류현진(27)이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더 몬스터'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제도가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올해까지 프로야구에서 뛰어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대신 류현진을 풀어준 한화는 이적료 2573만7737 달러 33 센트(273억773만 원)를 받아 올 FA 시장에서 정근우(31) 이용규(28)를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NPB와 MLB가 이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건 1998년. 그 전까지 두 나라 사이 선수 교류 때는 1967년 체결한 미일야구협정이 프로토콜이었습니다. 그러나 킨데쓰(현 오릭스)의 노모 히데오(野茂英雄·45), 히로시마의 알폰소 소리아노(37·사진 오른쪽) 같은 선수들은 계약상 허점을 이용해 미국 무대에 진출했죠. 구단은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나라 프로야구 사무국이 모여서 '아, 이를 어쩌면 좋으냐.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머리를 맞댔던 건 아닙니다. 만약 축구의 '보스만 룰'처럼 선수 이름을 따서 이 제도 이름을 정했다면 '이라부 룰'이 가장 적합했을지 모릅니다. 이라부 히데키 파동이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으니까요.

신인지명에서 1순위 지명을 받아 1988년 지바 롯데에서 데뷔한 이라부는 1994년 15승 투수가 됐고 1995년(2.53), 1996년(2.40)에는 2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습니다. 그 사이 노모가 LA 다저스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자기도 빅 리그를 꿈꿨습니다. 스승이던 바비 발렌타인 감독도 "메이저리그에 도전해 보라"고 권한 상태였습니다.

지바 롯데로서도 나쁠 게 없었습니다. 어차피 1년 뒤면 FA로 풀어줘야 하는 선수였으니까요. 다른 일본 팀에 빼앗기느니 미국에 보내는 게 나은 일이었죠. 그래서 자매 구단 샌디에이고로 가라고 권했습니다. 샌디에이고 역시 '일본의 놀란 라이언'을 얻는 대가로 마이너리그 투수와 외야수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라부는 "뉴욕 양키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텼습니다. 샌디에이고로 가라는 건 자신이 원하지 않는 트레이드일 뿐이라는 거죠. 이에 이라부의 에이전트 돈 노무라(團野村)는 "롯데와 샌디에이고의 트레이드가 가능한지 미국 법원에서 가리겠다"고 선포합니다. 미일야구협정에 트레이드 조항이 모호한 점을 파고들었던 겁니다.

그러자 지바 롯데는 "이라부가 양키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대신 양키스가 원하지 않을 경우 구단 뜻에 따르라"고 자세를 바꿉니다. 대신 이라부에게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죠. 이라부는 서명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바) 롯데는 이렇게 말했다고 최선을 다할 리가 없는 팀(응?). 롯데는 당시 양키스에 이라부하고 세실 필더(50)를 트레이드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프린스 필더(29·텍사스)의 아버지 세실은 당시 39홈런을 친 강타자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900만 달러가 넘는 1997년 연봉 절반을 양키스보고 부담하라고 했죠. 당연히 협상을 결렬됐습니다

롯데는 1997년 1월 "샌디에이고가 이라부와 독점교섭할 수 있는 구단"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계약 조건은 3년에 총액 600만 달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다음달 메이저리그 실행위원회는 "미일야구협정은 두 나라 간 트레이드를 금지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을 내렸습니다. 사실상 롯데와 샌디에이고의 트레이드를 승인한 겁니다.

롯데는 당연히(응?) 각서를 공개하며 이라부를 몰아붙였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뻔뻔스런 이기주의자였는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다시는 멋대로 메이저리그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습니다.그러나 이라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프링캠프 참여를 거부하며 샌디에이고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릴없이 샌디에이고가 그를 놓아줬습니다. 샌디에이고는 1997년 5월 "이라부를 양키스로 트레이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길고 긴 투쟁 끝에 이라부는 핀스트라이프(양키스 유니폼)를 입을 수 있었고 1998~1999년 2년 연속으로 양키스에서 10승 투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는 2003년 다시 한신으로 돌아온 뒤에야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라부가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건 아닙니다. 양키스가 이라부를 사전에 꼬득였기(탬퍼링) 때문에 이라부가 끝까지 버텼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야구 질서가 엉망이 됐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라부가 그냥 '구단 말이 맞다'며 포기했다면 이치로!(40)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33) 다루빗슈 유(ダルビッシュ有·27) 같은 선수들은 전성기를 메이저리그에서 보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기대만큼 메이저리그에서 대단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고 또 자살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이라부야 말로 미일 야구 교류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선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김연경도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습니다. 분명 잘못하고 있는 거고, 욕 먹는 게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김연경 덕에 한국배구연맹(KOVO)은 후배 선수들은 FA 연한 계산 때 해외 구단 임대 기간도 포함할 수 있도록 했고, 해외 이적에 관해서도 선수에게 유리한 쪽으로 제도를 바꿨습니다.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용기와 의지를 잃지 않는 자가 세상을 바꾸는 법이니까요.




댓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