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야구 규칙에는 얼핏 당연한 표현이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아래 조항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1.02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각 팀의 목적은 상대팀보다 많이 득점하여 승리하는 데에 있다(The objective of each team is to win by scoring more runs than the opponent).


궁금해서 야구하고 사촌격인 소프트볼 공식 규칙을 찾아 봤습니다. "정식 경기에서 더 많은 점수를 올린 팀이 승자가 된다(The winner of the game shall be the team that scores more runs in a regulation game)"는 규정은 있지만 거창하게 '목적'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이 뻔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건 리틀리그 소프트볼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사건 때문입니다. 미국 서부 대표팀 '사우스 스노호미시 리틀리그' 선수들은 18일(현지 시간)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B조 마지막 경기에서 남동부 대표팀 '로완 리틀 리그'에 0-8로 노히트 패배를 당했습니다. 노히트 패배가 다가오면 선수들은 번트를 대서라도 어떻게 출루하려고 애쓰게 마련. 그런데 이 팀 선수들은 오히려 아웃을 당하려고 일부러 번트를 대고, 땅 바닥에 튀고 들어온 공에도 헛스윙하기 일쑤였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바로 앞서 열린 경기에서 중부 대표팀 '센트럴 아이오와 올스타즈(사진)'가 캐나다 대표팀을 7-0으로 꺾은 게 방아쇠가 됐습니다. 이 승리로 중부팀은 3승 1패로 조별리그를 마감했습니다. 중부팀이 준결승전에 진출하려면 △서부팀이 남동부팀을 이기거나 △지더라도 3점 이상 득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3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던 서부팀이 이 경기에서 패하면 서부, 중부, 남동부팀이 모두 3승 1패를 이루게 되고 리그 규칙에 따라 중부팀이 탈락하게 되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알고 있던 서부팀이 '져주기' 경기를 벌였다는 게 중부팀 주장. 중부팀은 소프트볼 리틀리그에서 '살인 타선'으로 유명합니다. 조별리그에서 서부팀이 4-3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토너먼트에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 중부팀 찰리 휴색 감독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너무 노골적이라 반(半)이닝 만에 우리 선수들도 모두 눈치챌 정도였다. 선수들이 억울함에 부여 안고 울었다"며 "서부팀은 주전 선수 4명을 빼고 후보 선수들에게 1~4번 타순을 맡긴 것도 모자라 일부러 삼진까지 당했다. 이건 아이들 잘못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휴색 감독은 리틀리그 국제 토너먼트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서부팀이 실격당해야 했다는 주장이었죠. 위원회도 이 주장에 신빈성이 있다고 봤지만 실격 조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단판 플레이오프를 치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18일 오전 9시에 갑작스레 경기가 잡혔고 (당연히) 중부팀이 서부팀을 3-2로 꺾고 토너먼트에 진출했습니다.


휴색 감독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표정. 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걸 걸고 싸웠고 승리했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 없다. 재경기를 지시한 건 책임을 회피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리그 규정에 따르면 졸렬한 방식으로 선수들이 제 기량을 다 펼치지 못하게 하는 감독이나 코치는 실격시키도록 돼 있다. 합당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리틀리그에서는 감독이 선수가 치를 희생을 결정한다. 감독은 어떤 선수에게는 번트를 대라고 지시하지만, 어떤 선수들에게는 하지 않는다. 희생하라는 지시를 가장 자주 듣는 쪽은 경기력이 약한 선수들이다. 그들은 타자로서 성장할 기회를 승리라는 이름으로 희생당하면서 야구 인생을 박탈당한다. 그렇게 하면 팀 승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치고 배울 기회를 빼앗기는 탓에 선수로서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의 꿈을 담보로 해서 눈앞의 승리를 얻으려는 데 따르는 희생은 어떻게 보아도 자발적이지 않다. 그리고 스토아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관점 모두에서 비도덕적이다.


제가 즐겨 인용하는 책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에서 가져온 구절입니다. 일부러 패하라고 희생을 강요당한 선수들은 더 크게 소프트볼(야구) 인생을 박탈당했을 게 당연한 일. 당연히 훨씬 더 비도적적인 지도자들입니다. 나쁜 소년 소녀들이 왜 없겠습니까만 역시 더 나쁜 건 어른들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소프트볼 역시 '경기의 목적'을 규칙에 넣어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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