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정우영의 2-2 피치'에 재미있는 글이 나왔습니다. 네, 여기서 정우영은 제가 남자 아나운서 올스타 투표를 진행할 때마다 1위를 차지하는 그 SBS스포츠 아나운서 맞습니다. 정 아나운서가 스포츠서울에 연재하는 이 꼭지 이번 회 제목은 '강한 2번타자, KBO리그에 정말 필요한가?'입니다.


정 아나운서는 ESPN 칼럼리스트 키스 로가 '스마트 베이스볼(Smart Basebll)'에 썼던 내용을 토대로 '강한 2번 타자' 이론을 검증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사실 이 검증결과에 적잖이 놀랐다. 이 글은 경기초반 기선제압을 위해 강한 2번타자가 필요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전통적인 야구관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적용하다보니 KBO리그에서는 2번타자보다 3번타자의 기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ML과는 확연히 다른, 매우 특징적인 환경 속에서 KBO리그를 즐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재미있다고 느낀 건 지난 번에 '베이스볼 비키니'를 쓰면서 확인한 결과 때문. 지난해 한국과 일본(퍼시픽리그), 메이저리그(아메리칸리그) 타순별 OPS(출루율+장타력)를 비교해 보니 한국만 3번 타자보다 4번 타자가 OPS가 높았습니다. 지명타자 제도를 채택한 세 리그 중에서 한국만 더 잘 치는 타자를 3번이 아니라 4번에 놓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건 (정 아나운서가 결론 내린 것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4번 타자보다 3번 타자 기능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럼 2번 타자는 어떨까요?


여기서 잠깐 퀴즈 하나! 야구에서는 반드시 1번 타자가 선두 타자로 나서는 1회를 제외하면 이닝마다 선두 타자가 바뀝니다. 그러면 몇 번 타자가 선두 타자로 나왔을 때 점수가 제일 많이 나올까요? 그림을 보신 분은 이미 너무 쉽게 정답은 2번 타자라고 답하실 터. 적어도 2011~2013년 프로야구에서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왜일까요? 4번 타자 = 팀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가 반드시 타석에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좋은 득점 환경에서 타석에 들어설 확률이 높습니다. 3번 타자 역시 팀에서 두 번째로 잘 치는 타자니까요. 반면 1번 타자부터 이닝을 시작할 때는 4번 타자에게 반드시 타석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실제로 2008~2017년 기록을 보면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전체 타석 중 38.4%가 득점권(주자 2루 이상)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1~9번 타순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거꾸로 이 비율이 낮은 건 역시 1번 타자(27.3%)입니다. 1번 타자는 팀에서 가장 못 치는 8, 9번 타자 다음에 타석에 들어서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3번보다 4번 타순에 더 좋은 타자를 놓는 게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지금껏 그렇게 해왔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겁니다. 4번 타자에게 '밥상'을 차려줄 수 있도록 각 팀이 타선을 짰고 실제로도 그 전략이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번 타자에게는 '작전 수행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실제로 2번 타자는 다음(3번) 타자에게 득점권 주자를 제일 많이 늘려주는 구실을 했습니다. 2번 타자 타석 때 득점권 상황은 31.2%, 3번 타자는 36.5%니까 5.3%포인트가 늘어났습니다. 이 기간 2번 타자 OPS는 .732로 6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결과는 희생번트 때문이라고 해도 아주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럼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키릴 모롱이라는 세이버메트리션(야구 통계학자)은 타순별로 출루율과 장타력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해 '비욘드 더 박스 스코어'에 발표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면 타순을 다음과 같이 짤 때 점수를 제일 많이 뽑을 수 있습니다.


▌최고 득점 라인업 베스트 5

1 2 3 4 5 6 7 8 9 득점
1 4 7 5 3 8 6 9 2 5.110
1 4 7 5 3 6 8 9 2 5.109
1 4 6 5 3 8 7 9 2 5.108
1 4 6 5 3 8 7 9 2 5.107
3 4 7 5 1 8 6 9 2 5.107


요컨대 10년 동안 1번 타자를 맡았던 선수를 1번에, 4번 타자를 맡았던 선수를 2번(!)에 놓을 때 점수가 제일 많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까지 2번을 맡았던 선수는 9번 타순이 어울립니다. 그래서 현재 2번에 나오던 선수를 4번에 배치하면 점수가 제일 적게 납니다. 아래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점수가 가장 적게 나오는 타순을 뽑은 결과입니다.


▌최저 득점 라인업 워스트 5

123456789득점
8962713454.811
8962731454.813
8762913454.816
9862713454.817
8972613454.818


이 표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잘 치는 타자를 묶어 하위 타순에 배치하면 경기당 평균 득점이 0.3점 내려간다는 사실입니다. '마르코프 체인' 모델에 따라 분석하면 타순에 따른 득점력은 0.6~0.9점 차이로 벌이지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한 시즌은 144경기니까 0.3점을 기준으로 해도 43.1점 손해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에서는 보통 한 시즌 10점 기준으로 1승이 오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라인업만 잘 짜도 4승을 더 거두는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사실 타율이나 OPS 역순으로 타순을 짜는 것보다 제일 잘 치는 타자를 (예컨대 3~5번에) 묶어 모을 때 점수를 더 많이 뽑을 수 있다는 건 최소한 1974년 이미 밝혀낸 사실입니다. 2번 타자도 중요하고 중심 타선을 한 데 묶어 놓는 것도 중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중심 타선을 3~5번이 아니라 2~4번으로 끌어 올리면 됩니다. 제가 베이스볼 비키니를 통해 제안하려던 것도 바로 이 내용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는 이미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리그 기록을 살펴보면 지난해 2번 타자 전체 OPS는 0.781로 3번(0.811), 4번(0.798) 타자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습니다. 아메리칸리그에서도 10년 전(2008)에는 OPS 7위 선수가 들어서는 자리가 2번 타순이었고, 2014년만 해도 5위였습니다. 그러다 2015년 3위로 뛰어오르면서 분위기가 변했습니다. 2016년에는 4위로 순위가 내려갔지만 당시 3위였던 1번 타순(0.758)과 OPS가 0.001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정 아나운서 말씀처럼 2번 타자보다는 3번 타자가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다른 타순보다 2번 타자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팀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가 3번 타자 자리에, 그 다음으로 잘 치는 타자가 (4번이 아니라) 2번 타순에 자리잡는다고 해도 놀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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