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농구공과 배구공을 저울질하고 있는 제니퍼 햄슨. 데저레트 뉴스 홈페이지


제니퍼 햄슨(27)은 브리검영대에 재학 중이던 2013~2014 시즌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웨스트 코스트 컨퍼런스(WCC) 여자 농구 부문 올해의 선수상과 올해의 수비 선수상을 동시에 차지했습니다. 이 두 타이틀을 통시에 차지한 건 WCC 21년 역사상 햄슨이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서도 햄슨에게 관심을 보인 게 당연한 일. 로스앤젤레스(LA)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WNBA 팀 스팍스는 2014년 4월 14일(이하 현지시간) 열린 신인 드래프트서 2라운드 때(전체 23번) 햄슨을 지명했습니다. 그런데 샘슨은 그해 5월 16일 개막한 2014 WNBA 시즌에 맞춰 스팍스에 합류하는 대신 대학 선수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대신 이번에는 농구가 아니라 배구 선수로 뛰었습니다. 사실 2013년 WCC 여자 배구 부문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도 햄슨이었습니다. 햄슨이 WNBA 무대 대신 배구 코트를 선택한 건 2014 시즌 대학 배구 선수로 뛴 기록이 있어야 그해 미국 대학 대표선수 캠프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햄슨은 미국배구코치협회(AVCA)가 선정하는 2014년 올어메리칸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햄슨은 이듬해 2월 23일 스팍스와 계약하면서 WNBA 무대에 진출했지만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햄슨은 2015 시즌 경기당 평균 1.6점, 1.5리바운드, 0.5블로킹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후 러시아와 호주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다가 2017년 인디애나 유니폼을 입고 WNBA 무대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햄슨은 2017 시즌 12경기에 나와 경기당 평균 2.2득점, 2.1리바운드, 0.9블로킹을 기록한 뒤 WNBA 무대를 떠났습니다.


그 뒤 배구화 끈을 동여 맨 햄슨은 2018~2019 시즌을 앞두고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VC 비스바덴과 계약하면서 프로배구 선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V리그 진출을 꿈꾸면서 KOVO 트라이아웃 현장을 찾게 된 겁니다.


2019 프로배구 여자부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연습 경기에 참여한 제니퍼 햄슨(가운데).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햄슨은 "농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배구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더 늦기 전에 배구를 할 수 있는 몸 상태에서 배구 선수로 뛰고 싶다는 생각에 종목을 바꾸기로 했다"면서 "배구 선수와 농구 선수로 뛰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몸 상태를 체크하는 데 있어서는 농구 선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햄슨이 농구와 배구 선수로 동시에 뛴 유일한 선수인 건 아닙니다.


2015 시즌 WNBA 최우수선수(MVP)이자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농구 금메달리스트 엘레나 델레 도네(30·워싱턴·사진)도 댈라웨어대 대학 시절 배구부에 몸담은 적이 있습니다.


단, 델레 도네는 프로배구 선수로 뛴 적이 없는 것뿐 아니라 대학에서도 배구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프로농구(NBA) MVP 출신 가운데 프로배구 선수 유경험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NBA에서 MVP를 네 번 탔습니다. 이 선수 이름은 윌트 체임벌린(1936~1999). 네, 1962년 3월 2일 안방 경기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로 100점을 올린 그 체임벌린 맞습니다.


체임벌린이 처음 배구를 시작한 건 LA 레이커스에서 뛰던 1969년이었습니다. 무릎 수술을 받고 나서 재활 운동(!)으로 배구를 선택했던 것. 이 과정에서 체임벌린은 배구에 푹 빠졌고 아메리칸농구협회(ABA)를 거쳐 1974년 농구 선수 생활을 접은 다음에는 아예 프로배구 리그 창설에 나섰습니다. 


체임벌린은 1974년 인터내셔널배구협회(IVA) 이사가 됐고 이듬해에는 어른들 사정으로 아예 리그 회장이 됐습니다. 당시 그는 시애틀 연고 팀 스매셔즈 구단주이기도 했는데 가만히 박수만 치는 게 아니라 직접 게임에 나설 때도 있었습니다. 


NBA 필라델피아 시절(왼쪽)과 IVA 시애틀 시절 윌트 체임벌린. 동아일보DB 


체임벌린의 스타성이 빛난 건 1977년 IVA 올스타 게임. 체임벌린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CBS에서 이 경기를 중계했고, 체임벌린은 이 경기 MVP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고 해도 세월을 피해갈 수 없는 법. 체임벌린은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고 IVA도 1979 시즌을 마지막으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체임벌린은 이 시절 공로를 인정 받아 배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체임벌린의 자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그가 '2만 사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체임벌린이 한 종목 명예의 전당에만 이름을 올리는 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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