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프로 야구팀에는 주전 야수 9명 이외에도 핵심 전력으로 손꼽히는 선수들이 있다. 삼성 김재걸은 내야 전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만능형 수비수. 덕분에 주전이 아님에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지난 시즌 두산 윤승균은 겨우 90타수밖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도루 부문 2위(39개). 대주자로도 얼마든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시즌 역시 '10번째 선수들'의 활약은 계속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선수는 단연 현대 강병식. 그는 7월 11일 현재까지 타율.260/출루율.374/장타율.442의 타격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GPA로는 .279. 특히 대타 타석과 나머지 타석 기록을 나눠 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대타 타율이 .400이나 된다. 대타는 안타 한방이 꼭 필요한 시점에 타석에 들어선다. 또 장타율 .920이 보여주는 것처럼 안타 가운데 상당수가 장타였다. 장타는 다득점의 원동력. 해결사 본능을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 볼넷과 사사구 등으로도 꾸준히 출루하며 아웃 카운트 소모를 막기도 했다. 감독이 믿고 내보냈을 때 48.3%나 출루한 건 확실히 고무적이다. 팀이 꼭 득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내보내달라는 눈도장을 김재박 감독에게 확실히 받아둔 셈. 그럼 이번 시즌 현재까지 강병식이 경기의 흐름을 바꾼 경기 베스트 3를 알아보자.

 
  • No. 3 -  7월 11일 잠실 두산戰 

    4회초 이택근의 선제 솔로 홈런으로 주도권을 잡는 듯 했지만 4회말 곧바로 1실점 하며 현대 측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5~6회는 소강상태. 7회초 1사에 홍원기가 2루타를 치며 기회를 잡았고, 김동수의 몸에 맞는 볼로 찬스가 계속됐다. 김재박 감독은 서한규를 빼고 강병식을 투입했다.  

    두산 마운드에는 이번 시즌 유독 현대에게 강한 면모를 보이는 리오스. 두산 김경문 감독 역시 전상렬을 투입하며 외야 수비 강화에 나섰다. 계속해 외야수들에게 다소 전진 수비를 지시했다. 홍원기와 김동수 모두 발이 빠른 편이 못 되기에 홈에서 승부를 보려던 계산.

    하지만 강병식이 때린 타구는 잠실구장 좌중간을 완전히 갈랐다. 깨끗한 2루타성 타구. 주자 두 명을 모두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만큼 공은 멀리 날아갔다. 강병식은 공이 홈으로 중계되는 사이 3루로 뛰었다. 최종결과는 주자일소 3루타.

    현대는 강병식의 이 안타로 대량 득점 발판을 마련했고 7회에만 5점을 뽑아내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8회 공격에서도 4점을 더 뽑으며 시즌 전적 3승 7패에 내몰려있던 두산에 10:1 대승을 거뒀다. 김재박 감독의 용병술과 감독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준 강병식의 힘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 No. 2 - 5월 26일 잠실 LG戰 

    2회에 LG에게 먼저 한 점을 헌납했지만 4, 5회 차근차근 1점씩 뽑아내며 경기를 뒤집은 현대였다. 김재박 감독은 '06시즌 들어 첫 번째 1군 무대에 등판했던 김수경을 빼고 신철인을 투입했다. 지키는 야구를 하겠다는 뜻.

    안타와 실책이 겹쳤지만만 신철인은 6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승기를 이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7회 선두타자 박기남에게 볼넷을 허용한 게 화근이 됐다. 다음 타자는 LG의 간판 이병규. 이병규는 3구째를 받아쳐 잠실구장 펜스를 넘기는 역전 투런 홈런을 터뜨렸다. 현대 덕아웃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역전에 성공한 이순철 당시 감독은 송지만을 상대로 언더핸드 우규민을 마운드에 올렸다. 우익수쪽 안타. 좌타자 이숭용이 타석에 들어서자 이 감독은 다시 좌완 민경수를 투입했지만 결과는 안타. 다음 타자는 우타자 유한준. 이 감독의 선택은 다시 우완 경헌호였다. 유한준은 침착하게 희생번트를 성공시켰고 LG 관점에서 볼 때 1사 2, 3루의 위기가 계속됐다. 세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투수 세 명을 투입했지만 원하던 효과를 볼 수 없었던 것.

    여기서 이 감독은 새 외국인 투수 카라이어를 투입한다. 카라이어는 당시 LG에서 마무리 투수 후보로 갓 영입한 선수였다. 정성훈에게는 고의사구 사인이 나왔다. 1루를 채워 병살 기회를 만들기 위한 수순. 다음 타자였던 김동수가 3구 만에 1루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며 작전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대기 타석에 서한규가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라 확실히 현대에 불리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엔 대타 강병식이 있었다. 1구는 볼, 2구는 스트라이크. 강병식은 처음 상대하는 외국의 투수의 공을 유심히 관찰했다. 3구째 그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았다. 방망이 중심에 맞은 타구는 우중간을 가르며 높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LG 우익수 최만호가 부지런히 타구를 좇아 뛰었지만 타구는 이미 펜스를 넘어간 뒤였다. 2사에 역전 만루홈런이 터진 것.

    현대는 황두성을 투입 굳히기에 들어갔고, 9회에는 결국 박준수가 마운드에 오르며 승부를 매조지었다. 필승 계투조로 투입했던 신철인이 홈런을 허용하며 패배 쪽으로 기울던 현대의 운명을 강병식의 방망이가 살린 것이다. LG와 현대 감독이 보여준 용병술이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결과이기도 했다.

     



  • No. 1 - 5월 4일 수원 롯데戰

    손민한에게 두 점으로 묶인 채 현대가 3:2로 끌려가던 상황이었다. 8회 선두타자 이택근마저 삼진으로 물러나며 분위기는 더더욱 롯데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전준호가 안타를 치고 나갔지만 송지만의 타구는 힘없이 2루수 앞으로 굴러 갔다. 전준호의 빠른 발이 아니었다면 병살타가 됐을 타구. 현대의 8회말 공격이 끝날 위기였다.

    좌타자 이숭용을 상대하기 위해 강병철 감독은 좌완 가득염을 마운드에 올렸다. 손민한은 이미 107개의 공을 던진 뒤였다. 이숭용은 침착하게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이 순간 전준호가 3루 도루로 롯데 배터리 허를 찔렀다. 뭔가 한방 터지리라는 전주곡이었을까. 롯데는 새로이 '마당쇠'로 거듭나고 있던 이왕기를 마운드에 올렸다.

    정성훈은 서둘렀다. 초구 볼 이후 연거푸 헛스윙 두 개.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아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이왕기의 컨트롤이 흔들리고 있었따. 다음 타자는 유한준. 연일 호수비를 펼치며 롯데 팬들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김재박 감독은 여기서 강병식을 선택했다. 유한준이 아쉽게 입맛을 다지며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러나 아쉬운 건 유한준 혼자였다. 강병식은 2볼에서 가운데로 몰린 공을 놓치지 않고 받아쳐 주자일소 역전 2루타가 터뜨렸다. 역시나 전진수비를 펼치고 있던 롯데 외야수들 키를 넘기는 큰 타구였다. 

    강병식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잦은 등판으로 현대 마무리 박준수는 피로가 누적돼 있는 상태. 결국 2아웃을 잡아 놓고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2, 3루 위기가 찾아왔다. 박기혁이 때린 타구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며 3루에 나가 있던 이원석을 불러들였다. 경기는 5:4 한점 차였다.

    하지만 2루에 있던 박정준은 끝내 홈을 밟지 못했다. 우익수 송구가 정확히 포수 미트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익수로 수비에 들어가 있던 선수는 대타로 나선 강병식이였다. 방망이로는 역전을 일궈내고 어깨로는 동점을 막아내며 경기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강병식의, 강병식을 위한, 강병식에 의한 경기였다.




    물론 선발로 출전 때 기록은 많이 아쉽다. 타율이 채 2할이 안 되는 타자를 주전으로 내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타로서 강병식은 누구 못지않은 강타자의 면모다.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가장 확실한 실력으로 팀에 승리를 선사하는 진정한 '백기사' 강병식.

    이재주는 현대에서 기아로 옮긴 뒤 전문 대타 요원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번 시즌에는 아예 주전 지명타자 자리를 꿰찼다. 강병식도 언젠가는 이재주처럼 가능성을 터뜨릴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

    기회는 무작정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준비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에게만 기회가 찾아온다. 아니, 기회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강병식은 확실히 믿음을 통해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주전으로 나서도 '해결사' 본능을 자랑할 강병식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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