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 1

어나서 처음으로 야구 선수에게 사인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그 선수 소속 팀 보조 안방이던 수원구장에 부모님과 함께 야구를 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잔뜩 기대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은 전광판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대신 캐주얼 차림으로 아내 분과 함께 지정석에 앉아 계시더군요.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경기장을 찾은 저는, 동생 녀석이랑 둘이 무작정 탁자 지정석으로 달려가 야구표 뒷면에다 사인을 부탁드렸습니다. 볼펜 한 자루 없어 난처해하던 우리 형제. 그 선수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분께 직접 볼펜을 빌려 흔쾌히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꼬마팬들 행렬. 자리로 돌아오며 바라보던 그 선수 사인, 그리고 악수를 청했을 때 따뜻했던 그 촉감. 그래, 이게 프로 선수구나.

그 시절 저는 곧잘 그 선수와 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뛰는 상상을 하고는 했습니다. 선동열 선수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고 포수 장채근 선수에게 달려가 안길 때 '나는 1루로 달려가서 안겨야지'하고 생각했습니다. 9회초까지 노히트 노런, 그리고 우리 팀 공격 9회말 2아웃 그 선수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상상에 얼마나 많은 밤 뜨눈으로 밤을 지샜는지 모릅니다. 그 선수 홈런 세리머니를 따라, 삼진 하나를 잡을 때마다 가슴에 성호(聖號)를 그으려 했습니다. 유일하게 천주교 신자이던 그 순간.

그 선수 타격왕은커녕 프로 선수 생활 12년 동안 단 한번도 3할 타율을 기록해 본 적이 없습니다. 홈런왕은커녕 30홈런도 없습니다. 타점왕 물론 100타점도 요원하기만 한 기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선수는 데뷔부터 은퇴까지 한 팀에서 뛰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장종훈 선수랑 바꾸자고 했어도, 정말 바꾸지 않았을 그런 선수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말 제가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를 꿈꾸고, 야구를 살게 만들어준, 진정한 영웅, 제 마음 속 영원한 최고 강타자. '미스터 돌고래' 김경기.


# 2

는 현대 팬입니다. 아니, 저는 태평양 돌핀스의 영원한 팬입니다. 그리고 김경기 선수 팬입니다. 그렇게 제 모든 걸 걸고, 꼭 함께 하고 싶었던, 그 팀 일원이 꼭 되고 싶었던, 그 아름다운 존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꼭 그 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그 선수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삼미 - 청보 - 태평양 - 현대 라인을 따라 야구를 보신 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즌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던 '89년,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던 '98년, 리그 역사상 최강 팀이 아니었을까 싶은 '00년, 해태 타이거즈 이후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한 '03-04년. 그 중 제게 가장 기억나는 해는 처음으로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던 '94년이었습니다. LG에게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무릎 꿇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던 바로 그 시즌 말입니다.  태풍 태평양, 돌풍 돌핀스

'94 한국 시리즈를 떠올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김홍집 선수입니다. 삼성 팬들에게 선동열 선수와 명승부를 펼친 박충식 선수의 완투가 기억에 남는 것처럼, 이상훈 선수와 1차전 맞대결을 펼친 김홍집 선수. 비록 연장 11회말 김선진 선수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그날 가장 도미넌트했던 건 김홍집 선수였습니다. 3년간 기다린 인천 팀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첫 경기, 프로 2년차 김홍집 선수는 짠물 야구가 무엇인지 전국 야구팬들에게 확실히 알려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에서 벌어진 마지막 4차전 김용수 선수가 마지막 타구를 직접 잡고, 1루로 공을 던지기도 전, 두 팔을 번쩍 지켜들고 환호하던 모습. 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채널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동네 공원에 나가 나름 불펜피칭을 했더랬습니다. 내가 반드시 저 자리에 서겠다. 지금은 패자로 기억될 저 자리에, 내가 나가 승자로 기억되겠다. 꼭 노히트 노런을 해야지. 


# 3

해 골든 글러브 수상식, 당연히 수상을 기대했던 김경기 선수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김동기 선수도 함께 말입니다. 대신 그 자리를 우승을 차지한 LG 서용빈, 김동수 선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김기태 선수의 25개에 2개 차로 뒤진 23개로 홈런 2위에 만족해야 했던 김경기 선수 팬으로서, 그 순간 서용빈 선수가 참 미웠습니다.

하지만 그해 최고의 1루수는 김경기 선수였습니다. 각종 타격 기록이 앞서는 건 물론 팀에서 차지하는 장악력, 그리고 팀 성적을 이끌어 올린 공로 모두 김경기 선수가 서용빈 선수에 비해 한 발 앞서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LG 신인 3인방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킨 데다 구단이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고 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즌 최고 홈런 타자도 김경기 선수였습니다. 물론, 김기태 선수가 2개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한 건 사실. 하지만 이 홈런 가운데 3개는 그라운드 홈런이었습니다. 반면 김경기 선수 홈런은 모두 펜스를 넘어간 타구였죠. 인사이드 파크 홈런 가치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아쉬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즌 홈런을 실제 기록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기태 선수 홈런은 25개. 김경기 선수 홈런은 정규 시즌 23개, 포스트시즌 3개, 다해서 26개. 그 시즌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김경기 선수입니다.


#4

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94 시즌은 팀 성적도 정규 시즌 2위, 김경기 선수의 개인 홈런 타이틀 순위도 2위, 팀이나 김경기 선수 모두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는지라 참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나는 시즌이었습니다. 하지만 김기태 선수는 포스트시즌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돌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그것도, 김경기 선수 홈런포로 말입니다.

당시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꺾고 인천 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해태를 말입니다. '94시즌 해태에는 .393/.451/.581을 찍은 괴물 유격수가 버티고 있었던 그 팀을 말입니다. 상대는 전년도 꼴찌팀 태평양 돌핀스. 하지만 그 시즌 태평양 돌핀스는 짠물 야구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허약 타선. 김경기 선수에 거는 기대가 더 컸던 이유였죠.

인천에서 열린 1차전 선제 솔로 홈런. 2차전 역시 8:2로 승리를 거둔 가운데 홈런 한 방. 그리고 정말 중요했던 마지막 한방. 대전 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 앞선 두 경기를 중계할 때 하일성 해설위원은 잠실 구장 전광판을 맞히는 홈런을 때릴 수 있는 타자로 장종훈 선수와 김경기 선수를 언급합니다.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됐다는 듯 김경기 선수는 그 말을 실현시킵니다. 1:1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초 2아웃,  정민철 선수로부터 뽑아낸 대전 구장 백스크린을 넘기는 대형 홈런, 그렇게 그는 팀을 역사상 첫 번째 한국 시리즈에 진출시킵니다.


# 5

때 감동이란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 작년 ALCS 4차전에서 데이브 로버츠 선수 도루에 이은 빌 뮬러 선수의 동점타, 그리고 터진 슈렉의 끝내기 홈런. 아니, 그때도 이만큼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 우리도 이럴 수 있구나. 아, 우리도 한국 시리즈에 나갈 수 있구나. 

정말 인천 팬들이 김경기 선수에게 고대했던, 인천 팀을 한국시리즈로 진출시킨 바로 그 홈런이란 말입니다. 구도(球都)라는 말이 무색하게 프로 출범 이후 13년간이나 설움 속에 살아야 했던 인천 팬들을 울분을 한방에 날려 버린 홈런이었단 말입니다. 이 홈런으로 김경기 선수는 포스트 시즌 사상 최초로 3경기 연속 홈런을 날린 선수가 됐습니다.

그날 가슴 벅찬 충격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국 시리즈에 가다니, 이 팀이 한국 시리즈에 가다니. 정말 불가능해 보였던 그 일을 이뤄내다니. 86년만큼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당시 제게 13년이란 시간은 제가 살아온 생애 전체와 맞먹는 엄청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 6

후 팀이 현대 유니콘스로 간판을 바꾼 첫 해였던 '96 시즌, 김경기 선수는 1루 부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됩니다. 아울러 몇몇 언론사에서 각 포지션별 최고 수비수에게 선사하던 '매직글러브'마저차지하면서 공수에서 최고 1루수라고 확인받게 됩니다. 하지만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안타깝게 해태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은 정명원 선수가 먼저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 '98 시즌 외국인 거포 쿨바 선수가 등장하자 김경기 선수는 1·3루를 넘나드는 활약을 선보이며 .274/.354/.457 18 홈런, 59 타점을 기록하게 됩니다. 김경기 선수는 이해 126경기 모두에 출장했고, 팀은 당당히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결국 김경기 선수는 4년전 팀 역사상 첫 번째 한국 시리즈에서 4연패를 안겼던 LG에 설욕하며 고향팀에 첫 번째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안기게 됩니다.  “그 동안 인천 팀이 우승을 못해서 아쉬웠던 팬들에게 이제야 보답한 것 같다.”




시 2년 후인 2000 시즌, 김경기 선수는 처음이자 마지막 트레이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김경기 선수가 진짜 트레이드 됐다고 느낀 건 2000년 7월 7일의 일이 아닌 현대가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한 날이었을 겁니다. 김경기 선수를 SK로 보내는 대신 현대가 받은 건 현금 2억원이 아니라 팬들이 보낸 철저한 모멸과 조롱이었을 겁니다. 인천을 떠났지만 연고 선수가 많은 현대를 응원해야 할지 연고 선수는 별로 없지만 인천을 연고로 하는 SK를 응원해야 할지 망설이던 많은 분들 아마 이 순간 SK팬이 되셨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니 고향은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떠나본 적 없는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해 현대는 퀸란 선수 활약 속에 팀 역사상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98 시즌 우승했을 때, 정명원 선수가 울먹이며 "창호랑 같이 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인터뷰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정말이지 그 자리에 김경기 선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아마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인천 팀에 우승을 안기지 못한 걸 팬 여러분께 죄송해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천 팀은 태평양 돌핀스도, 현대 유니콘스도 아니었습니다.

2000-2001 시즌, 그는 SK에서 모두 97경기 274 타석에 나서 .263/.391/.371 6홈런 30타점을 기록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통산 1182경기 출장 4576 타석 .275/.355/.436 138 홈런 598 타점. 우승 1회. 준우승 2회. 골든 글러브 1회. 그렇게 인천 야구 영웅은 그라운드 전면에서 물러나 후배 양성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번 시즌 김경기 선수는 SK 와이번스의 타격 코치를 맡고 계십니다,


# 7

신 양준혁 선수가 해태로 트레이드 된다는 소리를 친구에게 전해들었을 때, 임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삼성의 양준혁이냐, 양준혁의 삼성이지?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의 가판대에 헤드라인으로 실린 기사를 보고서도, 요즘말로 하지만 찌라시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사는 사실이었고, 몸속에 파란 피가 흐른다던 양신은 붉은 유니폼을, 그리고 줄무니 유니폼까지 입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파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양신은 다시 몸속에 흐르는 파란 피에 충실할 수 있게 됐고 결국 팀에 첫 번째 우승을 선사했습니다.

그런 의미였습니다. 김경기 선수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 일, 정말 다시 인천 팀에서 뛰게 해주어야만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일. 그 선수의 전성기가 지났든, 아니 전성기의 포스가 양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신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제 맘 속 영웅을 떠나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보내주기 싫은데, 계속 제가 응원하는 팀에서 뛰게 해주고 싶은데,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니, 보내는 게 맞는 일이었습니다.



김경기 선수는 김진영 전 감독님 자제분. 인천 야구의 적자(嫡子), 상인천중 - 인천고를 졸업한 인천 야구 최고 타자 유망주. 이영민 타격상 수상, 88 서울 올림픽 4번 타자. 늘 물방망이가 고민이던 인천 팬들의 갈증을 한번에 날려줄 거라 기대했던 인천 야구의 희망. 태평양 돌핀스의 미스터 돌고래, 아니, 아니, 그 무엇보다 '인천의 자존심' 김경기. 어찌 그를 다른 도시의 팀에서 뛰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아무리 그를 그리워하고, 그를 아무리 필요로 한들, 인천 팬들보다 덜 그리워하고, 덜 필요로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김경기 선수를 잘못, 하지만 잘 보내드린 일이었습니다. 양신의 피가 파란 색이듯, 김경기 선수의 혈관에는 짠물이 흐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보도하지도 않은 김경기 선수 은퇴 기사를 읽으며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예감했던 은퇴. '홈런왕 한번 못하고, 3할 한번 못 쳐보고 끝나네.' 그리고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페이지를 펼쳐 김경기 선수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환히 웃는 표정. 그렇습니다. 그 은퇴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팀을 위한, 인천 팀을 위한 용단(勇斷)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천 팬을 기쁘게 하기 위해,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던 것입니다. 안녕, 나의 영웅. 결국 한번도 필드에서 함께 뛰어보지 못한 나의 동료, 나의 심장, 안녕. 안녕. 어쩌면 눈물이 몇 방울 흘러 내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밖에 보내주지 못해서. 구단이 자행한 상처를 고스란히 떠맡긴 채 보내야만 해서. 미안합니다, 인천 팬·현대 팬 모두에게 영웅이어야 할 선수를 그렇게밖에 보내주지 못해서. 마음 같아서는 장종훈 선수보다 훨씬 더 성대한 은퇴 경기를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아니, 김용수 선수가 그랬듯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땅볼 타구를 당신께 던지고 힘차게 당신께 달려가 안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승 트로피를 안을 때 제가 정말 제 모든 힘을 다해 기도했듯, 당신은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제게 늘 기도에 대한 보답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 기억해 주십시오. 정말 고마웠습니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정말 고마웠습니다. 언젠가 꼭 인천 팀 감독으로, 다시 한번 인천 팬들의 가슴에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 당신이 있어 저는 야구를 꿈꿨고, 야구를 살았습니다. 인천은 영원히 당신의 나와바리(繩張り)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진정한 인천 야구, 아니 인천의 자존심입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 kini註 ────────
아주 오래 전에 파울볼에 썼던 글을 옮겨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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