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이택근이 LG로 간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지난해 12월 17일 한 팬이 트위터에서 브룸바(@brum24)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브룸바가 답한 말. 브룸바는 지난 시즌까지 히어로즈에서 뛰었지만, 히어로즈는 재계약을 거부했다.


마지막 응원팀: 유니콘스

야구 담당도 아닌데 야구 블로그를 하고 있으니 신기해하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어느 팀 응원하세요?"하는 질문도 많이 듣죠. 제 대답은 늘 "응원 팀 없이 그냥 야구를 좋아합니다. 그냥 야구를 좋아하는 거죠"입니다. 하지만 왜 없었겠습니까?

2008년 2월 4일은 제가 한창 수습기자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 옛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유니콘스 팬이어서 죄송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의 야구는 이렇게 죽었다.'

잠깐 두 번째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나는 이 팀과 함께 자랐다. 임호균으로 시작한 이 팀 에이스가 장원삼이 되고, 양승관이 버티던 중심 타선에서 브룸바가 괴력을 선보이는 동안, 코흘리개 꼬마는 어느새 187cm짜리 청년이 돼 있었다.

이 팀은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늘 외인구단 냄새를 풍겼다. 다른 팀에서 쫓겨 오거나 다른 팀에서 뛰었더라면 진작에 쫓겨났을 선수들이 뛰는 구단. 열심히 뛰는 것 말고는 남보다 더 잘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선수들이 모인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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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 인수해) 자금 사정이 좋아진 뒤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평양 선수들 사이에 피닉스 코칭 스탭이 뒤섞였고 또 트레이드를 통해 전준호가 건너와 1번 타자 자리를 꿰찼다. 선수들 실력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인천 토박이보단 외지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 팀 팬들에게 '홈런 슈퍼집 아들' 최창호는 인천 토박이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인터뷰를 하는 정명원 역시 당연히 인천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는 뭉쳤다. 그리고 그렇게 선수들 역시 뭉쳤다.

이 팀은 항상 그렇게 '외인들이 똘똘 뭉치는 팀'으로 자랐다. 열혈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으로 자란 이숭용이 인정했듯 "선수단 분위기는 두산에도 안 지는" 팀이 돌핀스였고, 유니콘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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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응원팀을 옮기기도 하고, 더러 야구를 끊기도 했지만 남은 현대 팬들은 굳건히 버텼다. 팬심을 측정하는 체에 거르고 또 거르면 이만큼 충성심에 가득찬 팬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서럽고, 아쉽고, 분하고, 억울하고, 짜증이 나도 이 사람들은 오직 한 팀만을 보고 살았다. 이들이야 말로 민들레보다 더 일편단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 사람들이다.

못난이 애인을 사랑하는 더 못난 순둥이들.

네, 저는 이 팀과 함께 자랐습니다. 김경기는 장종훈하고도 안 바꾸는 지구 최고 4번 타자였고, 2006 류현진이 아무리 괴물 신인이어도 1989 박정현한테는 못 당합니다. 제 휴대전화 벨소리 중 하나는 '돌핀스, 돌핀스, 무적함대 돌핀스'하고 울립니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를 찾아보기 힘든 태평양 돌핀스 응원가.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야구 팬 아버지가 세상에 저를 낳았고, 그 분이 슈퍼스타즈를 응원했을 뿐. 그 팀이 핀토스, 돌핀스를 거쳐 유니콘스가 되고, 서류상으로 히어로즈가 될 때까지 응원 팀을 바꿀 만한 아무 이유도 찾지 못했을 뿐.

야구를 끊으면 끊었지, 응원팀은 못 바꾼다고 생각했을 뿐.

그래서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저를 왜 하필 이 팀 팬으로 키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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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애써 비겁하게 피했습니다. 술자리에서도 한 번 확인할 때마다 100원 씩 올라가는 무선 인터넷으로 히어로즈 경기 진행 결과를 확인했으면서도, '목동의 푸른 하늘에 히어로즈 기를 높이 올려라. 목동의 푸른 하늘에 히어로즈 기를 높여라' 하는 응원가를 힘껏 같이 따라불렀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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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 선수들을 잃고야 알게 됐습니다. 아, 두 번 다시 택근이가 30-30하는 타자가 되라고, 원삼이가 10승을 거두라고, 현승이가 어깨에 힘 좀 빼라고 응원하는 날은 없겠구나. 자기 분야게서 최고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그들을 100%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겠구나.

그래서 올해는 더욱 목청껏 히어로즈를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히어로즈 팬 여러분 힘냅시다. 우리는 잘못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저 그 누구보다 일편단심인 죄밖에는… 히어로즈는 올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꼭 다음 생에도 당신 아들로 태어날 테니, 그 때도 꼭 이 팀 팬으로 키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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