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우리는 스피드건에 찍히는 구속(球速)에는 큰 차이가 없음에도 속구의 품질이 차이 나는 이유를 알아봤다. 결국 속구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투구폼, 특히 릴리스 포인트다.
하지만 제 아무리 질이 좋은 속구라고 해도, 계속 똑같은 코스만 고집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상식이다.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는커녕 타자가 타이밍을 잡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타자는 공을 보고 때리는 게 아니라 가상의 타격 포인트를 향해 스윙한다. 이 타격 포인트를 왜곡시키는 것이야 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다.
여기까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한 가지 비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비밀은 바로 투구 속도에 감춰져 있다.
세 가지 종류의 구속
투수의 구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스피드건에 찍히는 물리적 속도(Real Velocity), 타자가 느끼는 체감 속도(Perceuved Velocity), 그리고 제구력과 구종에 따라 결정되는 효과 속도(Effective Velocity)가 바로 그것이다.
체감 속도는 말 그대로 타자가 체감하는 구속으로, 주로 투구폼에 의해 결정된다. 투수의 릴리스 포인트, 투수가 공을 숨겨 나오는 정도, 팔이 넘어오는 속도, '어깨 회전 지연 기술(Delayed Shoulder Rotation Skill)' 등이 체감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 체감 속도는 실제 구속보다 공이 빠르게 혹은 느리게 보이는 것을 설명할 뿐, 타자가 직접 반응하는 타이밍에 대해서는 완벽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반응하는 속도, 그것이 바로 효과 구속이다.
매덕스의 비밀 볼 배합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전편에 이어 다시 그렉 매덕스 얘기를 해보자. 매덕스는 물론 체감 속도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뛰어난 투수다. 체감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 많은 요소를 그의 투구폼에서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매덕스는 가장 긴박한 위기 상황에서 특정한 볼 배합을 적극 활용하는 투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비밀 볼 배합은 지극히 단순하다.
초구는 안쪽 체인지업, 2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그리고 결정구로 몸 쪽 속구를 구사한다. 이게 전부다. 하지만 상대 타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유격수 또는 2루수 땅볼로 물러난다. 도대체 여기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초구로 구사하는 몸 쪽 체인지업은 속구를 노리고 있는 타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시발점이다. 몸 쪽 특히 그 가운데서도 낮은 쪽으로 들어오는 체인지업은 속구를 노리고 있는 타자의 타격 포인트를 한 박자 늦게 왜곡시킨다.
2구 바깥쪽 체인지업은 결정구를 위한 셋업 피치(Set-up Pitch)다. 셋업 피치란 승부구를 던지기 전 사전포석으로 던지는 공을 의미한다. 몸 쪽 속구를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한 투구라는 얘기다.
그리고 승부구는 몸 쪽 속구, 바깥쪽 체인지업을 지켜본 타자는 이 공의 속도가 실제보다 더 빠르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왜곡된 타격 포인트에 방망이를 휘두르고 마는 것이다.
효과 속도의 비밀
'정말 이것만으로 통할까?' 싶을 정도로 단순한 볼 배합. 하지만 그렉 매덕스는 타자들이 3구째 안쪽 속구를 항상 제 타이밍보다 늦게 때려낸다고 밝힌 바 있다. 그것도 '항상'에 힘을 주어서 말이다.
매덕스의 말처럼, 타자들은 몸 쪽을 향해 날아온 투구에 대해서는 실제 구속보다 더 빠르다고 느끼게 된다. 몸 쪽 투구에 스윙하려면 바깥쪽 공보다 좀 더 허리를 빨리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몸 쪽 공을 때려내려면 자기 앞발보다 훨씬 앞쪽에 타격 포인트가 만들어져야 한다.
거꾸로 바깥쪽 투구에 대해 타자는 실제 구속보다 느리다고 느끼게 된다. 공을 충분히 지켜볼 여유를 조금 더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격 포인트가 상대적으로 뒤쪽에 위치해도 공을 때려내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매덕스가 자랑하는 비밀 볼 배합의 경우, 몸 쪽 체인지업이 시속 120 km였다면 투구 방향 때문에 실제로 타자는 시속 130 km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 빠른 공은 아니지만 매덕스의 속구 평균 구속보다도 확실히 느린 속도다.
2구째 체인지업 역시 같은 시속 120km라고 해도 타자는 시속 110km 정도로 느린 볼이라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깥쪽을 향해 날아온 공이었기 때문이다. 느린 공을 더 느리게 활용하는 매덕스의 전략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 뛰어난 전략은 3구째 화룡정점에 달한다. 안쪽 속구가 시속 138km라면 타자는 시속 145 km 정도의 볼이 들어온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더욱이 바로 이전 투구를 시속 110 km 정도로 느낀 상황에서 이 투구는 엄청 빠르다고 느겼을 확률이 크다. 시속 30km가 넘는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른 공에 대비하려고 빠른 스윙을 감행한 타자의 방망이에는 공이 늦게 와서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전략이야 말로 결국 타자를 압도하는 위대한 매덕스의 원천이다.
"배팅은 타이밍, 피칭은 그 타이밍을 빼앗는 것."
지난 글 모토는 같은 구속의 공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위협적으로 뿌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번 글 초점은 효과적인 투구 전략에 더 가깝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투수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고 할 수 있다.
체감 속도의 변화 역시 타이밍 싸움에서 뺴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덧붙여 효과 속도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을 때, 투수는 타이밍 싸움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설 때 노림수를 하나씩 가지고 들어간다. 마음속으로 '속구가 오면 때린다.'고 수없이 되뇌며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마음속의 울림이 크고 강해도 날아오는 공에 맞춘 몸의 대응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이 효과 구속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헛스윙을 분석해 보면, 투구의 궤적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사례가 훨씬 많다. 방향이 잘못된 스윙보다는 타이밍이 늦거나 이른 스윙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효과 속도의 활용 역시 빠른 볼에 수준급 변화구를 장착한다고 해서 절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타자의 심리를 읽고 이를 역이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빠른 볼을 가진 투수에게 왜 변화무쌍한 새 구종 장착을 서두르지 않느냐고 타박하기보다, 볼이 느린 투수는 무조건 제구력이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한번쯤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다른 방안은 없는지 진지하게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점에 있어 효과 구속의 활용은 썩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