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결국 선무당이 힘을 모아 태양이 끌어 내리고, 국보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말았습니다.  


선동열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55·사진)은 14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국가대표 야구감독직 사퇴 기자회견문'을 배포한 뒤 마이크 앞에 자리한 선 전 감독은 "사퇴를 통해 국가대표 야구팀과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금메달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약 1분 30초 만에 자리를 떴습니다.


이로써 적어도 2020년 도쿄(東京) 올림픽 때까지는 전임으로 야구 대표팀을 이끌 것이라고 예상하던 선 전 감독은 선임 479일 만에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렇게 한국 야구계 숙원이던 전임 감독제는 첫 걸음부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습니다.



정운찬이라는 선무당

선 전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을 앞두고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71·사진)와 면담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지난달 23일 정 총재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뒤 이 자리가 처음.


장윤호 KBO 사무총장은 "선 전 감독이 사퇴 의사를 전하자 정 총재가 20분 넘게 만류했다"고 전했지만 정작 이 기자회견장에 정 총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취재진 사이에서 '(바로 두 층 아래 사무실에 있는) 정 총재가 직접 올라 오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온 게 당연한 일. 이에 장 총장은 "총재님이 많이 놀라셔서 경황이 없으시다"고 답했습니다.


기자회견문을 보면 정 총재가 놀랐을 만도 합니다. 선 전 감독은 이 A4용지 세 장짜리 문서에 "불행하게도 KBO 총재께서도 국정감사에 출석해야만 했다. 전임 감독제에 대한 총재의 생각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 자진사퇴가 총재의 소신에도 부합하리라 믿는다"고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손혜원이라는 선무당

정 총재는 원래 친분이 있던 손혜원 의원(63·더불어민주당·사진) 요청으로 국정감사 자리에 나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임 감독제에 대해 찬성은 안 한다. 국제대회 빈도가 낮고 상비군도 없는 현실이라면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KBO 수장이 선 감독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했던 겁니다. 


정 총재의 선 전 감독 깎아내리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손 의원이 TV 중계를 통해 선수를 관찰한 선 전 감독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 거론하자 정 총재는 "선 감독의 불찰이었다. 야구장에 안 가고 선수를 (방송으로) 살펴보고 지도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경제학자가 시장 등 현장을 가지 않고 지표만 분석하고 예측하고 정책 대안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거들기도 했습니다.


이 한 마디로 지난달 10일 선 감독이 손 의원에게 "특정 경기장에 나가면 한 게임밖에 볼 수 없고, 괜히 선수들이 긴장하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 TV 4분할 화면으로 여러 경기를 동시에 보는 게 업무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던 건 '게으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 전 감독도 물론 필요할 때는 구장에 나가 직접 선수를 살폈습니다.



국정감사라는 굿판

선 전 감독은 손 의원에 대한 불만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같은 문서에 "어느 국회의원이 말했다. '그 우승이(아시안게임 금메달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제 사퇴 결심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썼습니다.


선 전 감독은 계속해 "국가대표 감독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으며, 대한체육회 역사상, 국가대표 감독 역사상, 한국야구 역사상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스포츠가 정치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그리하여 무분멸하게 증인으로 소한되는 사례는 내가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야구 대표팀 운영이 국정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미 금메달을 딴 야구 대표팀 구성 과정이 국회 문광위에서 가장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었을까요? 선 전 감독이 국정감사에 나왔던 10일은 올해 국정감사 첫날이었습니다.


또 국정감사는 수사나 재판이 아닙니다. 선 전 감독이 국정감사에 나가야 했던 건 한국청렴운동본부라는 곳에서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으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 일부 선수에게 특혜를 줬다는 것. 그러나 국정감사에 참석한 그 누구는 물론 국민권익위원회도 결국 선 감독이 이 법을 어겼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사퇴를 하거나, 사과를 하시라"고 '정치적 호통'이 난무했습니다.


선 전 감독은 자리를 내놓는 자리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되어야 마땅하다'면서도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고, 금메달이라는 목표에 매달려 시대의 정서를 살피지 못했다"며 다시 한번 사과했습니다.



야구의 것은 야구에게

정 총재는 서울대 총장을 마치고 다시 강단으로 돌아온 첫 날(2006년 9월 1일) 한 학생으로부터 'KBO 총재에 뜻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해도 시켜주지 않을 것 같은데… KBO 총재 자리는 정치적 역량이 있어야 하는데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야구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할 수 없는 자리"라고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정 총재 스스로 지금까지 정치적 역량을 증명하셨기에 그 자리에 앉게 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정'이 호시탐탐 야구를 노릴 때마다 야구가 그저 오롯이 야구로 존재하게 막아주셔야 합니다.


그런 임무를 맡겼고,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기에 야구 선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선수가 당신 성함이 들어간 공 하나에 웃고 우는 겁니다. KBO 총재는 야구에 대해서는 사견이 없는 자리입니다.

 

손 의원은 2015년 김성근 전 한화 감독(75)을 옹호했다가 야구팬들로부터 비판에 시달리자 "승부에서 졌다고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마저 폄하하고 조롱하며 책임추궁을 한다면 누가 그 부담스러운 자리에 있겠습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 전 감독은 승부에서 이겼는데도 자리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혹시 본인이 이번 국정감사 때 "실력있고 바름 사람을 그저 끌어내리려 잔머리 쓰는 사람"이 되신 건 아닌가요?


앞으로 두 분이 정치적으로 무엇을 더 하시고 싶어 하시는지 저를 포함한 야구팬 대부분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야구의 것은 제발 야구에게 좀 맡겨주세요. 아무리봐도 여러분에게 선 전 감독이 쓴 것처럼 "야구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이 느껴지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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