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그게 사실 쇼케이스였다고. 그런데 쿠바 야구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 눈에 띄는 선수가 별로 없었어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쿠바 대표팀을 서울 고척스카이돔으로 초청해 그해 11월 4, 5일 연습 경기를 진행했습니다. 이 두 차례 맞대결에는 '2015 서울 슈퍼시리즈'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B조, 쿠바는 A조에서 조별리그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대회를 앞두고 연습 경기를 진행하는 게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경기는 KBO에서 주관한 첫 번째 고척돔 경기였기 때문에 2008 베이징(北京) 올림픽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쿠바만큼 좋은 파트너를 찾기도 어려웠던 게 사실.


그런데 나중에 만난 한 프로야구 서울 팀 고위 관계자는 "쿠바 대표팀이 한국을 찾은 게 꼭 대회 전 컨디션 조절 때문만은 아니었다"면서 "한국에 오면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 원)씩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프로 팀으로부터 눈도장을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쿠바는 야구뿐 아니라 모든 종목에 걸쳐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류현진(31)과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에서 한솥밥을 먹는 야시엘 푸이그(28·사진)는 본인이 정확히 몇 번인지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끊임없이 해외 탈출을 시도한 끝에야 결국 멕시코를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단,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쿠바 정부는 2013년 9월 쿠바야구협회에서 일본 프로야구 팀에 선수를 임대하는 형태로 야구 선수 해외 진출 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9일 프레드릭 세페다(38)가 쿠바 선수로는 처음으로 요미우리(讀賣)와 정식 선수 계약을 맺었습니다.


세페다는 당시 총액 2억 엔(현재 약 20억1600만 원)에 계약했고, 이 중 적지 않은 금액을 쿠바야구협회에서 챙겼습니다. 이후 쿠바 선수 12명이 더 일본 프로야구 팀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쿠바야구협회 수입도 늘어났을 게 당연한 일. 


이렇게 일본에서 재미를 본 쿠바야구협회가 한국까지 시장을 확대하려고 했다는 게 이 관계자 전언이었습니다. 그는 "아예 몇몇 선수를 특정해 영입 의사가 없냐는 질문까지 받았지만 미국이나 도니미카(공화국) 선수가 더 나은 것 같아 사양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오늘까지도 이런 루트를 통해 한국 프로 팀과 계약한 쿠바 야구 선수는 한 명도 없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 건 쿠바야구협회에서 100만 달러 정도는 정말 푼돈으로 보일 시장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시는 것처럼 이 시장은 바로 메이저리그입니다. 


20일 AP 통신 등에 따르면 쿠바야구협회는 메이저리그 사무국, 선수노동조합과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 입찰)을 도입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쿠바 리그에서 6년 이상 뛴 25세 이상 선수는 누구나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반대급부로 쿠바야구협회는 짭짤한 이적료를 챙기게 됩니다. 만약 쿠바 선수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는다면 쿠바야구협회는 △2500만 달러까지는 20%(최대 500만 달러) △그 다음 2500만 달러(총액 5000만 달러)까지는 17.5%(최대 937만5000 달러=500만 달러+437만5000 달러) △5000만 달러 초과분에 대해서는 937만5000 달러에 추가 15%를 더해 이적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이너리그 계약일 때는 25%가 쿠바야구협회 몫입니다.


푸이그는 "미래 쿠바 선수들은 우리가 겪었던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행복하다"면서 "협상에 애쓴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쿠바 출신인 호세 어브레유(31·시카고 화이트삭스)도 "심장으로 느끼는 이 기쁨과 흥분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며 감격해 했습니다.


미국과 쿠바는 1902년 수교를 맺었지만 1961년 단교했고 이후 2015년 국교정상화 이전까지 54년 동안 적대적인 관계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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