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호주 퍼스에서 열린 지난해 페드컵 결승전 장면. 퍼스=로이터 뉴스1

문. 남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 명칭은 '데이비스컵'입니다.

 

그러면 여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 이름은 뭘까요?

 

답. 일단 올해까지는 (사진설명에서 보신 것처럼) '페드컵'이 정답이었습니다.

 

1963년 대회 설립 때는 '페더레이션컵'이라고 불렀는데 1996년부터 현재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포스트제목에서 보신 것처럼) '빌리진킹컵'으로 정답이 다시 바뀝니다.

 

테니스계에 양성 평등 바람을 불러 일으킨 빌리 진 킹.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홈페이지

국제테니스연맹(ITF)은 페드컵이라는 이름을 'BNP 파리바 빌리진킹컵'(Billie Jean King Cup by BNP Paribas)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17일(이하 현지시간) 발표했습니다.

 

먼저 BNP 파리바는 프랑스 파리에 본점을 둔 프랑스 최대 은행입니다.

 

이 은행은 테니스 팬들에게는 '다섯 번째 메이저 대회'라고 평가받는 인디언웰스 마스터스 후원사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또 현재 페드컵 후원사 역시 BNP 파리바입니다.

 

그리고 메이저 대회에서 총 39번 우승한 빌리 진 킹(77)은 테니스 세계에서 '양성 평등 운동' 선구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빌리 진 킨 통산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
 대회  여자 단식  여자 복식  혼합 복식  합계
 호주 오픈  1  0  1  2
 프랑스 오픈  1  1  2  4
 윔블던  6  10  4  20
 US 오픈  4  5  4  13
 합계  12  16  11  39

 

킹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면서 다른 여자 테니스 선수 8명과 함께 1970년 '버지니아 슬림스 서킷'을 조직했습니다.

 

이 서킷은 현재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셈이 빠르신 분은 올해가 버지니아 슬림스 서킷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라는 걸 눈치 채셨을 겁니다.

 

ITF에서 페드컵을 빌리진킹컵으로 바꾸려는 건 바로 이를 기념하려는 뜻입니다.

 

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올해는 대회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빌리진킹컵이라는 이름은 내년(2021년)부터 사용하게 됩니다.

 

'양성 대결' 당시 빌리 진 킹.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홈페이지

대중적으로 킹하면 떠오르는 제일 유명한 이미지는 아마 '양성 대결'(Battle of the Sexes)일 겁니다.

 

먼저 도발한 건 바비 리그스(1918~1995)였습니다. 리그스는 아마추어 선수와 프로 선수로 각 세 차례 메이저 대회 정상을 차지했던 테니스 선수 출신입니다.

 

그는 만 55세였던 1973년 "US 오픈에서 남녀 선수 상금을 똑같이 맞추겠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 선수들은 기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붙어도 현역 선수를 이길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양성 대결' 당시 바비 리그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홈페이지

그러면서 킹을 대결 상대로 지목했지만 킹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리그스는 킹과 라이벌이었던 마거릿 코트(75)와 맞붙어 2-0(6-2, 6-1)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승리 이후 리그스가 더욱 기고만장하게 굴었던 게 당연한 일.

 

이에 킹은 도전을 받아들였고 그해 9월 20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리그스를 3-0(6-4, 6-3, 6-3)으로 꺾었습니다.

 

당시 만 30세였던 킹은 경기 후 "쉰 다섯 살 먹은 아저씨를 꺾은 건 조금도 기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테니스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사실은 아주 기쁘다"고 덧붙였습니다.

 

'양성 대결'을 앞두고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빌리 진 킹. 포커스 온 스포트 홈페이지

킹은 1970년 이탈리아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처음으로 '남자 선수와 똑같은 상금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일리에 너스타세(74)는 상금으로 3500 달러를 받아간 반면 킹은 6분의 1 수준인 600 달러가 전부였습니다.

 

메이저 대회 가운데 가장 먼저 이 요구를 받아들인 건 US 오픈이었습니다.

 

킹이 1973년 대회를 앞두고 '남자 단식 우승자와 상금을 똑같이 주지 않으면 대회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US 오픈 당시 빌리 진 킹. 뉴욕 데일리 뉴스 홈페이지

당시 킹은 '더블 디펜딩 챔피언'이었는데 1972년 대회 우승 상금으로 1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남자 단식 챔피언인 너스타세가 2만5000 달러를 받았으니까 40% 수준밖에 못 받았던 겁니다.

 

미국테니스협회(USTA)는 이듬해 US 오픈 남녀 단식 우승 상금을 똑같이 2만5000 달러로 맞췄습니다.

 

그 뒤로 US 오픈은 계속 남녀부 상금이 똑같습니다.

 

 

4대 메이저 대회 가운데 남녀 단식 우승 상금에 있어 제일 재미있는 기록을 남긴 건 호주 오픈입니다.

 

호주 오픈은 1984년1985년 남녀 단식 우승자에게 똑같이 10만 호주 달러를 상금으로 지급했습니다. 

 

호주테니스협회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에서 첫 번째 대회로 호주 오픈 일정을 바꾸면서 1986년 대회를 건너 뛰었습니다. 

 

그 뒤 1987년 여자 단식 우승 상금으로 11만5000 호주 달러, 남자 단식 우승 상금으로 10만3875 달러를 책정합니다. 아예 여자 단식 우승 상금이 더 많았던 겁니다.

 

1988년에도 여자 단식 우승 상금(11만 호주 달러)이 남자 단식(10만5000 호주 달러)보다 더 많았습니다.

 

1988, 1989 호주 오픈 2연패를 달성한 슈테피 그라프. 동아일보DB

그러나 1989년 여자 단식 우승 상금이 2만5000 호주 달러 오르는 동안 남자 단식 우승 상금은 3만5000달러가 오르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이후에도 1991~1995년은 남녀부 상금이 똑같았지만 1996~2000년에는 다시 여자부가 적었습니다.

 

그러다 2001년 이후로 남녀 선수에게 똑같은 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오픈은 2006년부터 남녀부 상금이 똑같습니다.

 

이듬해(2007년)에는 윔블던 역시 같은 방식을 선택하면서 메이저 대회 남녀부 상금은 모두 똑같아졌습니다.

 

사실 상금이 똑같기 전에도 차이는 이미 크게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호주 오픈이 선수들 사이에서 메이저 대회로 인정받기 시작한 1973년 메이저 대회 남자부 상금 대비 여자부 상금 비율은 65.6%였습니다.

 

이 비율은 1983년 90.5%를 기록한 뒤 뒤 줄곧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윔블던 혼자 남녀부 상금이 달랐던 2007년이 되면 이 비율은 98.9%까지 오른 상태였습니다.

 

물론 2008년 이후 이 비율은 계속 100%입니다.

 

그 결과 테니스 선수는 적어도 여자 선수 가운데서는 독보적인 소득을 올리게 됐습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서 1990년 여자 운동 선수 수입을 집계해 발표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테니스 선수가 1위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킹이 내딛었던 첫걸음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으니 여자 테니스에서 가장 큰 무대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USTA는 2006년 이미 US 오픈이 열리는 경기장 이름을 '빌리 진 킹 테니스 센터'로 바꿨습니다.

 

전 남편 래리와 빌리 진 킹. 라이프 홈페이지

그래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킹이 사실은 전 남편 성(姓)이라는 점입니다.

 

빌리 진 킹은 원래 아버지 성을 따라서 빌리 진 모피트라는 이름을 썼지만 스무 살이던 1965년 남편 래리 킹(75)과 결혼하면서 빌리 진 킹이 됐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로런스 하비 자이거'라는 본명이 따로 있는 방송인 래리 킹 아닙니다.)

 

이후 킹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성 정체성을 깨닫고 1987년 이혼했지만 성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참고로 데이비스컵 역시 1900년 이 대회를 설립한 사람 이름이 드와이트 필리 데이비스(1879~1945)라 이렇게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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