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양성평등시대. 물론 좋은 말이다. 정말로 우리 사회는 양성평등을 완벽하게 이루고 있을까? 이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여성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마초적이라고 규정한다. 반면 남성들은 역차별이 심하다며 하소연 중이다. 그래,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이 자리는 양성평등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스포츠를 이야기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번 야구장으로 장소를 옮겨 생각해 보자. 야구장 안에서는 어떨까? 물론 그라운드 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 관심은 관중석이다. 아니, 관중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좀더 범위를 확장해 보자.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어떨까? 그러니까 문화 영역으로서 '야구'라는 범주 안에서 과연 양성평등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고 있을까?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야구는 과연 양성 모두에게 평등한가?


많은 여성 야구팬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물론 남성 팬도 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사실 야구장은 거의 전적으로 남성들을 위한 공간이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게 사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그런데 현재는 과거에 비해 여성 야구 인구가 부쩍 늘었다다. 안향미 씨를 시작으로 여성 야구 선수도 늘었다. 이제 언론에서 주부 야구 선수를 소개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 못 되는 형편이다. 관중석 위의 여성은 더더욱 늘었다. 그렇다면 야구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도 좀 변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물었다. '여성 야구팬 여러분, 무엇이 그토록 그대가 야구팬인 걸 힘들게 만듭니까?' 아래는 이 질문에 대해 여성 야구팬들의 회신한 내용이다. 말하자면, 야구장에서 또 야구 커뮤니티에서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그 경험담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럼 먼저, 너무 당연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여자는 야구를 좋아하면 안 되는가? 당연히 안 될 게 없지 않나?


많은 여성 야구팬들이 여성이 야구를 본다는 것 자체를 이상한 시각으로 보는 남성이 많다고 답했다. 여성 야구팬은 야구가 아니라 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좋은 말로 '오빠 부대', 나쁜 말로 '빠순이'다. 먼저 한번 남성들 시각에서 얘기를 해보자. 흥국생명 핑크스는 지난겨울 많은 남성 스포츠팬들 로망이었다. 그 이유는? 1)여자 배구가 주는 아기자기하면서도 끈질긴 승부 매력 때문에? 2)여자 배구 선수들 섹스어필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 2)가 좀더 사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마리아 샤라포바는 윔블던 타이틀이 있으니 그렇다 치자. 안나 쿠르니코바가 정말 뛰어난 테니스 선수라서 인기가 많은가? 국내로 시선을 돌려 좀 오래된 얘기를 해보자. 천은숙과 전주원, 누구 실력이 더 뛰어났을까? 그리고 누가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가? 남성들도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게 잘못인가?


남성이 여성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성들에게 남성 스포츠 스타를 향한 로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성(性)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양성애자가 이성을 흠모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오빠 부대'를 아니 '빠순이'를 비웃지 말자.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해주자. '빠순이'들도 엄연한 야구팬이다. 그것도 그 어느 팬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야구팬이다.

물론 필요에 비해 시끄럽고, 자기주장이 터무니없이 강하고, 비이성적인 논리를 끝도 없이 펼치는 여성 팬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남자 팬은 없는가? 잔뜩 술에 취해 야구장에서 고래고래 큰 소리로 쌍시옷만 내뱉는 중년 남성 관객은 아주 드문 존재인가? 그냥 이 둘 모두를 야구장의 자연스런 풍경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건가? 야구장이 무슨 한적하고 고요한 절간이 되길 바라는 것인가?


야구는, 아니 스포츠는 성인군자가 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하라고 이 세상에 스포츠가 존재한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섹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그 어느 매력에 끌리든 기본적으로 고매한 성질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다. 9회말 2아웃에 터져 나온 짜릿한 끝내기 홈런이 주는 감동도 결국 말초신경 자극으로 우리가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스포츠다. 그저 '빠순이'들이 이런 욕망에 더 충실할 뿐이다.

그런데 야구라는 종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야구를 보면서 더 큰 쾌감을 느려면 좀더 많은 걸 알아야 한다. 우선 규칙이 심각할 정도로 복잡하다. 주변에서 야구 깨나 안다고 소문난 사람들조차 공식 규칙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정답을 알기 힘든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세이버메트릭스라는 놈이 등장하면서 기이한 기록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예전에는 타자를 평가할 때 타율, 홈런, 타점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OPS, DIPS, EqA 등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영어 약자들이 판친다. 야구 좀 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점점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해야 되는 것만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WXRL이라는 메트릭이 있는 걸 모른다고 해서, 마무리 투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올라와 경기를 매조지하는 순간의 감동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야구를 보는 데 있어 '알고 있는 정도'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큰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다. 스트라이크 세 개면 삼진이고, 아웃 카운트 세 개를 잡으면 한 이닝이 끝난다는 것, 그리고 점수를 더 많이 낸 팀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도 야구를 즐기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물론 야구를 보다 보면, 이런 기본 상식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땅에 볼이 떨어지기 전에 수비수가 잡으면 주자가 움직일 수 없다고 했으면서, 왜 저 주자는 3루에서 태그업을 하는가? 많은 야구팬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상황조차 초보 야구팬에게는 충분히 낯설어 보일 수 있다. 이런 갈림길에서 어떤 이들은 더 배우고 싶어하지만, 누군가는 이 정도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규칙뿐 아니라 세이버메트릭스든 바이오메카닉스든 마찬가지다. 물론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보인다. 하지만 좀 많이 안다고는 이유로 타인이 야구를 즐기는 방식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 걸까?

그러니까 낫아웃이나 인필드 플라이 룰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로 잘난 척하지 말자는 얘기다. 많은 여성 팬들은 이미 '이런 규칙도 알고 있느냐'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해답을 알든 모르든 야구를 즐기는 데 있어 별 상관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통해 남성 팬이 여성 팬을 '초보팬'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도대체 누구에게 초보와 고수를 나눌 자격이 있단 말인가? 굳이 나누자면 좀더 야구를 신나게 즐기는 쪽이 고수에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거듭 말하자면, 진짜 중요한 건 야구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야구를 더 많이 좋아하고, 야구를 더더욱 유쾌하게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아는 것은 좋은 것만 못하고, 좋은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고 말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마음껏 야구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그냥 모두가 자기 방식대로 야구를 즐기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것일까? 야구를 보는 이유는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를 찾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많은 여성 팬이 지적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여성이 혼자 야구를 즐기러왔다고 나무라지 말라는 것. 팬이 드문 스탠드 위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에 고래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야구를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혹은 쓸쓸해 보인다는 이유로 접근해봤자 처음부터 좋은 소리 듣기 어렵다. 남자든 여자든 야구팬은 그저 모두 똑같은 야구팬으로 받아들이자.


인터넷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해진 게 비단 다른 동네 이야기만은 아니다. 국내 프로야구 사이트는 물론 메이저리그 사이트에도 꽤 많은 여성 유저가 존재한다. 하지만 게시판은 철저하게 남성 위주다. 회원 대다수가 남성 유저인 상황에서 이런 분위기를 피하기는 쉽지 않을 일인지 모른다. 그래도 부탁건대 한번만 자신이 다른 사이트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생각해 보자. 

만약 늘 다른 사이트에도 반라(半裸) 여성 사진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리고 있다면 굳이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면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야구 사이트에만 그런 사진을 끊임없이 올린다면 뭔가 잘못된 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세상에는 얼마든 그런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가 문을 열고 있다. 사진뿐 아니라 게시물 내용도 마찬가지다.


꽤 오랫동안 야구장은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다. 어쩌면 스포츠라는 세계 전체가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야구뿐 아니라 많은 스포츠에서 여성 팬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관중 감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분명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여성 팬들에게게는 애로사항이 너무 많다. 먼저 구장 시설 자체가 여성들에게 편리한 구조가 아니다. 지방 구장 여자 화장실은 여전히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수준. 젊은 여성이 선호하는 먹거리도 야구장에서 그리 쉽게 찾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야구가 좋아서, 야구장을 찾고 야구 커뮤니티에서 열혈 회원으로 활동하는 여성 야구팬이라면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정작 남성 팬들이 이 여성들 적이 되고 있다. 때로는 선수만 쫓아다니는 '빠순이'로 몰기도 하고, 때로는 야구에 무지하다는 비난 속에 논쟁에 끼어들 자격조차 주지 않기도 한다. 같이 야구장에 갈 친구를 찾기 어려워 홀로 찾아간 야구장에선 끈적한 시선에 시달려야 하고, 야구장 친구를 만들어 볼까 하고 찾아간 야구 커뮤니티 역시 지극히 남성적인 분위기가 한 가득이다. 도저히 마음 편히 야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야구를 자기 뜻대로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빠순이'를 그냥 '빠순이'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다. 그들 역시 자기 스타일대로 야구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팬일 뿐이니까 말이다.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싸우는 일, 제발 야구판에서만큼은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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